안승(安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548C2B9FFFFU9999X0 |
이명(異名) | 보덕국왕(報德國王) |
이명(異名) | 안순(安舜)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고구려 |
활동분야 | 왕실 > 왕족 |

부 | 연정토(淵淨土) |

[상세내용]
안승(安勝)
생졸년 미상. 고구려 왕족. 보덕국왕(報德國王)‧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또는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도 하며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하여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劍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이어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검모잠과 대립하게 되어 그를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신라는 안승 집단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안치하였다.
674년(문무왕 14) 보덕국왕에 봉해졌으며 680년에는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된 채 신라 중앙귀족이 되었다.
보덕국은 684년 그 주민이 반란을 기도하다가 진압되어 소멸하였다.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또는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도 하며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하여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劍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이어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검모잠과 대립하게 되어 그를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신라는 안승 집단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안치하였다.
674년(문무왕 14) 보덕국왕에 봉해졌으며 680년에는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된 채 신라 중앙귀족이 되었다.
보덕국은 684년 그 주민이 반란을 기도하다가 진압되어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資治通鑑
高句麗遺民史硏究(盧泰敦,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舊唐書
資治通鑑
高句麗遺民史硏究(盧泰敦,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집필자]
노태돈(盧泰敦)
대표명 | 안승(安勝) |
성명 | 안승(安勝) |
성명 : "안승(安勝)"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