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 식년 사마시는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 해는 식년[甲子]이어서 식년시를 거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식년시를 실시하였지만,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 1월 27일」 기사에 의하면 시험 부정으로 인해서 시험이 파방 되었다.
그러나,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에 파방된 생원시의 장원이 기록되어 있다. 생원 장원은 전주이씨 이찬(李瓚)이고 진사 장원은 청주한씨 한백륜(韓伯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험의 파방으로 1447년에 생원시만 설행해서 200명을 선발하였다. 진사시는 태조‧정종 때까지 시행되다가, 태종 때 혁파되었다. 그후 1438년(세종 20)에 복구하였고, 1444년(세종 26)에 다시 혁파되었다가, 1453년 단종 때 재차 복원되었다. 1444년 사마시가 파방이 되어서 조선시대 사마시는 231회가 아닌 230회가 설행되었다.
이 해에 사마시가 설행되었다는 증거로 「백패(白牌)」(화순 진주형씨 형군철가)가 현전하고 있다. 1444년 3월에 유학(幼學) 형군철(邢君哲)이 진사(進士)에 제84인으로 합격하였다는 교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