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대중(金大中)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B300C911B1924X0
호(號)후광(後廣)
생년1924
졸년2009
시대대한민국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정치 > 대통령
김운식(金雲植)

[상세내용]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2009년 8월 18일. 현대 정치가. 호는 후광(後廣)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출생지는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하의면(荷衣面)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고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부친은 김운식(金雲植, 천주교 세례명은 요안, 1894년 음력 12월 11일 ~ 1974년 음력 2월 10일)이고, 모친은 장수금(張守錦, 다른 이름은 장노도[張鹵島], 본관은 인동, 1893년 음력 6월 17일 생으로 1972년 음력 5월 10일 사망)이다. 부인은 차용애(車龍愛, 1927년 생으로 1945년 결혼, 1959년 사망)‧이희호(李姬鎬, 1922년 생, 1962년 결혼)이다.

1935년 5년제 전라남도 소재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1943년 가을에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으며 1946년 말 퇴사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가입했다. 1946년 초 사회경제학자 백남운이 이끄는 조선신민당 목포지부 조직부장이 되었으나 소련 추종파들과 갈등해 여름에 탈당했다고 전해진다. 좌익단체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에 가입해 부위원장의 활동을 병행했으며 1946년 10월 31일 목포 파출소 습격사건의 배후조종자로 구속되었으나 이내 석방되고 1947년 장인의 권고로 한국민주당 목포지부에 입당한 이후에는 우익에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즈음 해운회사를 창업하고 1948년 10월 목포일보를 인수해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51년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의 전라남도 목포 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와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다. 1955년 민주당에 입당했고 1957년 장면을 대부로 노기남 서울대교구장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그해 8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려했으나 등록무효가 되었으며 1959년 보궐선거, 1960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강원도 인제에서 낙선했다. 1961년 5월 14일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으로 입후보해 인제에서 당선되었으나 이틀 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활동은 하지는 못했다.

1963년 11월 26일 제6대 민주당 국회의원(전라남도 목포), 1967년 6월 8일 제7대 신민당 국회의원(전라남도 목포),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에 이어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민주당 전국구)으로 선출되었다(6선).

1970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 등과 제휴해 김영삼(金泳三)을 40여 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를 얻어 역전승했으므로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이 일로 인해 단번에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539만 표를 얻어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朴正熙)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와 신민당은 100만 표 이상 조작된 부정선거라며 박정희 후보와 공화당을 비난했다 김대중은 비록 패배했지만 그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이 장기화 되면서 김영삼(金泳三)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로 간주되었다.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국내‧외를 오가며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활동하면서 박정희 정부에 저항했다.

제8대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동포들을 규합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직후 김대중은 고노 겐소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회견을 갖고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했으며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정력적인 반 유신 투쟁을 벌였다. 1973년 하와이를 경유하여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대중은 조윤형, 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했다.

1973년 3월 25일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 사회에서 강연 및 반정부 시위 활동을 벌였다. 초대 서울시장 김상돈, 미주민주국민회의 의장 임창영, 전한국신학대학장 김재준, 예비역 해군제독 이용운 등 교포 사회에서 활동 중인 여러 지식인, 예비역 장성 등 한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동포들과 함께 뜻을 모은 김대중은 1973년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의 전신으로 약칭은 한민통)발기인 대회를 얼었으며 초대의장으로 추대되었다.

1973년 7월 10일에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했다. 이렇듯 그는 1973년 7월 미국에서 반체제단체를 결성했고 다시 일본에서 그 지부 결성을 준비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해외에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반박정희 세력이 결집되는 데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식(8월 15일)을 1주일 앞둔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을 강행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은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 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그랜드팔레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통일당 당수 양일동(梁一東)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한국 중앙정보부 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해로를 통해 동해로 강제 압송되었으며, 129시간 만에 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한국 공권력의 일본국의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납치와 압송 과정에서 그는 대한해협에 수장될 위기에 처했다고도 한다. 결국 미국의 조정 및 한‧일 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서기관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이 합의됨으로써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도쿄에서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면서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

1976년 3월 1일 김대중은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정계‧종교계‧학계인사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발표해 윤보선을 제외하고 일주일 사이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소위 명동사건).

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라고 하는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결론으로서 “이 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라고 맺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긴급조치 철폐, 민주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의 독립과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 등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은 김대중은 1977년 12월 19일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듬해 12월 27일 2년 9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바로 가택연금 되었다.

박정희 사후인 1980년 초 이른바 ‘서울의 봄’ 시절에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으나, 최규하 정부 당시 실력자였던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 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야당인사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20여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했다.

이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에서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광주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죄로 김대중에게 극형에 처할 것을 추진했다.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내란음모의 주모자라는 사실이 인정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민주화 진영의 계속된 항의와 미국 등의 압력에 직면했던 전두환 대통령은 감형 지시를 내렸다. 1월 23일 곧 바로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김대중에 대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의결했다(2004년 무죄 판결을 받음).

이 당시 김대중은 신군부에 의해 영어 이니셜 DJ로 불리기 시작했다. 1982년 12월 김대중은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제12대 총선 4일 전인 1985년 2월 8일 귀국했다.

귀국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했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 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대응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민심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선명 야당바람을 불게 했으며 대통령 직선제가 국민의 열망임을 확인시켜주었다. 1985년에는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공동의장직을 맡았다. 이듬해 1986년에는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1987년 11월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이라는 새 정당을 창당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자 노태우(828만 표)와 차점자 김영삼(633만 표)에 이어 611만 표를 얻고 3위로 낙선했다.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 실패가 군부정권 연장을 초래했던 것이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다. 제13대 국회는 ‘1노 3김’의 4당 체제 속에 여당의 다수당 위치가 무너지고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됨으로써 김대중은 재기에 성공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의 김영삼을 대표하는 통일민주당, 제3야당의 김종필을 대표하는 신민주공화당이 통합해 1990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3당합당).

내각책임제를 고리로 연결한 합당을 야합이라 규정했던 김대중은 거대여당에 대항해 1990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해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1년 10월 8일 김대중은 삼당합당을 성토하고 내각제합의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10월 29일, 김영삼 대표와 만나 내각제합의 폐기와 지방자치제 실시에 대한 약속을 받고 단식투쟁을 그만두었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자인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의 997만 표에 193만 표 뒤지는 804만 표를 얻는데 그쳐 다시 낙선했다. 그는 1992년 12월 19일 곧바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로 가서 1년 동안 연구했다.

1994년에 귀국하여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정치 재개를 준비했다. 1995년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96년 4월 11일 열린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어 낙선했다.

그러던 중 1997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말기 외환위기가 일어나 사상초유의 국가 부도에 직면했다. 결국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으며 경제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었다. 이 와중인 1997년 10월 김대중은 김종필이 이끄는 자유민주연합과 내각책임제추진을 고리로 이른바 DJP 연대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1,032만 표를 획득해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993만 표)를 39만여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것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인 여야 간의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였다.

김대중은 대내‧외적으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는데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의 꿈을 이루었다. 추운 겨울에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낸다는 야생화 인동초(忍冬草)라 불리어졌던 그가 납치‧가택연금‧투옥‧사형선고‧망명을 견뎌내고 대통령이 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199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민의 정부’라고 자칭했던 김대중은 취임 직후부터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으며 신자유주의 기조의 경제 정책을 세워 경제 위기 극복과 경제 재건에 매진했다. 그 결과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해 IMF 신탁통치로부터 탈출했다.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도 정부 출범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11월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게 되었고 1999년엔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햇볕정책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북한 김일성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해서 벌인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통일 방향에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했다.

이러한 남북관계 진전과 국내외 인권 향상에 끼친 공적을 인정받아 2000년 말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세계정치지도자상을 받았다.

그러나 야당은 통일방안 합의 등 햇볕정책의 합의를 비판하는 등 대북 정책 추진 도중 잡음도 있었다. 2003년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과 합의해 특별검사를 임명하면서 조사하자 햇볕정책은 본격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0년 6월 12일 5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은,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검 도중인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여기에 김대중의 측근인 박지원은 SK 등 대기업 자금 1억 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으며 특검은 종결되었다. 한편 김대중은 퇴임 이후 첫 외신과의 인터뷰였던 2004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렇듯 햇볕정책이라는 명분하에 2000년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불법을 무릅쓰며 현금까지 지원했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3년 2월 24일까지 대통령에 있었던 그는 다음 날인 25일 자신의 후임인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 했다. 그는 마포구 동교동의 아태평화재단 건물과 평생 수집한 자료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했는데, 연세대학교는 이 건물 명칭을 김대중도서관으로 바꾸어 2003년 11월 3일 개관했다. 이 도서관에는 김대중의 생전 유품과 개인 소장 도서 등 김대중 관련 사료, 통일 관련 자료, 노벨평화상 상장 및 메달 많은 관련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2009년 8월 18일 85세를 일기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국장 기간 중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고 북한 김기남 조선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한 특사 조의조문단을 비롯 미국, 중국, 일본 등 11개국이 8월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했다.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대통령 묘역에 있다.

종교는 천주교이고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이다.

저서로는 『김대중 옥중 서신』(1984)‧『한국: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1992)‧『나의 삶 나의 길』(1994)‧『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1999)‧『김대중 자서전』전2권 (2010) 등이 있다.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홍일(金弘一, 1948년생)‧김홍업(金弘業, 1950년생)‧김홍걸(金弘傑, 1963년생)이며, 딸은 김소희(1946년생으로 1947년 사망)가 있었다.

[참고문헌]

김삼웅, 『김대중 평전 1: 행동하는 양심으로』 (서울: 시대의창, 2010)
조선일보(2009.08.19)
동아일보(2009.08.18)
한겨레(2009.08.18)
김대중도서관

[집필자]

이완범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9-30박정희 사후, 대통령 당선 시기까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충.[수정자:양창진]
2012-10-01두산백과-김대중 도서관 항목을 참고하여 김대중 도서관 건립 사실 추가.[수정자:양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