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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익(崔昌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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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최창석(崔昌錫)
일명(一名)최창순(崔昌淳)
일명(一名)최동우(崔東宇)
생년1896(건양 1)
졸년1957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허정숙(許貞淑)
출생지함경북도 온성

[상세내용]

최창익(崔昌益)
1896년∼1957년. 독립운동가‧공산주의운동가. 함경북도 온성 출생. 창석(昌錫)창순(昌淳)동우(東宇) 등의 이름을 쓰기도 하였으며, 여성공산주의운동가 허정숙(許貞淑)의 남편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정경과를 졸업하였다. 일본유학중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강경전주군산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하다가 일시 일본경찰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10월 이른바 노동대회사건에 연루되어 이시완(李時琓)강택진(姜宅鎭)장일환(張日煥) 등과 함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24년 4월 21일 결성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그해 12월 서울청년회 별동조직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25년 모스크바국제공산당대회에 서울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였고, 만주 닝안현(寧安縣)에서 김좌진(金佐鎭)김혁(金赫)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민부(新民府)에도 관계하여 귀국 직후인 1925년 10월 서울청년회 신민부 사건으로 한빈(韓斌)이경호(李京鎬)이영(李英) 등과 함께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26년 신민부 단원 박두희(朴斗熙)와 함께 소련에 대한 신민부 접근대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으며, 김영만(金榮萬)과 함께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 대하여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승인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로 하였다.

1928년 2월 제3차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잡혔다.

1935년 출옥하여 이듬해 중국으로 건너가 한커우(漢口)에서 전위동맹을 결성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여 1938년 5월 김원봉이 조직한 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김원봉과 결별하고 연안(延安)으로 이동, 무정(武亭)과 합류하였다.

1941년 1월 진동(晉東)에서 중국공산당 지원 아래 이건우(李建宇)무정 등과 함께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42년 김두봉(金枓奉)무정한빈 등과 더불어 조선독립동맹창건에 참여, 부주석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평양으로 귀국하였는데, 귀국 전인 9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정치국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6년 3월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으로 개편되자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8월 북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중앙위원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재정상, 1952년 부수상 등을 지냈으며, 1954년 재정상, 1955년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하다가 1956년 박창옥(朴昌玉)윤공흠(尹公欽) 등과 함께 반당‧반국가 종파분자로 비판받고 좌천되었다가 1957년 숙청당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年鑑 1948年版(朝鮮通信社, 1947)
韓國共産主義運動史 5(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6)

[집필자]

김남식(金南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