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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필(具榮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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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최계화(崔桂華)
호(號)일우(一友)
생년1891(고종 28)
졸년1926
시대항일기
본관능성(綾城)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상세내용]

구영필(具榮泌)
1891년(고종 28) 1월 17일∼1926년 9월 14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일우(一友). 다른 이름은 최계화(崔桂華)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밀양(密陽)이다.

구성백(具性伯)과 한기순(韓琪順)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1910년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를 졸업한 후에 2년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경(政經)을 연구하였다. 한일합병 후에 1912년까지 만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가서 1년 동안 활동(活動)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경남 밀양에서 명도석(明道奭), 김대지(金大池), 이수택(李壽澤), 황상규(黃尙奎) 등과 항일비밀(抗日秘密) 결사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에 봉천성으로 나가다가 명도석, 김대지와 함께 일본(日本)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6개월 복역하였다. 1919년에 봉천성 안동현(安東縣)으로 나가서 독립운동 기관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처남 김용술(金用述)과 함께 봉천성에 개설하고, 원보상회(元寶商會)를 안동(安東)에 만들어서 독립운동의 교통기관(交通機關)이 되어 연락(聯絡)하였다. 3‧1운동(三一運動) 당시에 상해(上海)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임시의정원(臨時義政院) 의원(議員)에 추천(推薦)되어 가정부(假政府)를 조직하고 재정부위원(財政部委員)이 되었다.

1919년 5월에 길림(吉林)에서 동지 황상규와 같이 군정서(軍政署)를 조직하고 군수과장(軍需課長)과 교통사장(交通司長)을 겸임하였다. 1919년 11월 9일 동지 황상규, 김대지와 함께 일합사(一合社)를 해체 후, 중국 길림에서 밀양인 출신 후배 김원봉(金元鳳)과 외사촌 동생 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 등을 중심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1920년 2월경에 영고탑(寧古塔)에 가서 그 당시 활동 근거를 정돈하고, 3월에서 여명의숙(黎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어, 한국역사, 산수, 중국어 등을 가르쳤다. 5월 중국에서 의열단 김원봉, 황상규, 이종암(李鍾巖), 한봉근 등과 함께 최초로 계획한 1차 공격인 밀양폭탄사건을 위해 경성(京城)을 거쳐 밀양으로 들어왔으나,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의열단 단원들이 대거 체포될 때, 체포망을 벗어나 피신하였다. 12월 부산으로 잠입하여 김용술(金用述), 김재현(金在絃) 등과 같이 박용만(朴容萬)이 서명한 경고어재내동포(警告於在內同胞) 경고서와 독립전보(獨立戰報) 약 100장을 부산, 밀양, 김천, 대구, 동래의 유력자 및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 등 15군데에 발송하고 나머지는 부산 초량동, 영주동 등지의 각 상점에 배포하였다. 이 사건이 1년 후에 발각되어, 1921년 12월 2일 김용술은 징역 1년 6개월, 구영필은 피신하여 결석재판을 받아 3년형에 언도되었다.

1921년 초, 구영필은 중국 영고탑에서 조선인 자치기관인 한교호회(韓僑戶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선되어 수전사업을 펼치며 이주 동포를 지도하다가 국제문제로 중국 관헌에게 한교(韓僑)의 간판(看板)을 압수당했다. 1921년 봄, 구영필은 그의 가족과 동생 구영근 가족, 여동생 가족 등과 함께 밀양에서 영고탑으로 이주하였다. 6월, 최계화(崔桂華)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에 입적(入籍)하여 영안현입적간민호회(寧安縣入籍懇民戶會)로 조직을 변경하고 회장으로 추천되어 이주동포를 계속 지도하였다. 농지를 매입하고 간척지 개간과 수전사업(水田事業)을 일으켜, 조선인 이주가 급증하였다.

1922년에 간민호회의 최계화는 1920년에 설립한 공제호(共濟號) 기관에 새로이 정미소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1924년 적기단(赤旗團)을 결성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3월경에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신한노농회(新韓勞農會)를 조직하여 이주동포를 돕고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 김좌진(金佐鎭)의 신민부(新民府)와 적기단과의 노선 투쟁이 격화되었다. 1926년 신민부 별동대원(別動隊員) 황덕환(黃德煥)에게 피살되었다.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史 4권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11집
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정부사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공훈사 p.82

[집필자]

김정자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