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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시우(左時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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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송암(松菴)
생년1829(순조 29)
졸년1920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학자 > 유학자
출신지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곽지리(郭支里)

[상세내용]

좌시우(左時祐)
1829년(순조 29)∼1920년. 조선 후기 유학자‧항일운동가. 호는 송암(松菴)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곽지리(郭支里) 출신이다.

타고난 수재(秀才)로 부(賦)에 특히 능했다. 진사에 합격한 그는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를 하자 본래의 성씨인 ‘좌(佐)’를 ‘좌(左)’로 고쳐야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며 제주도내 친족들에게 청하여 호적을 ‘좌(左)’씨로 고쳤다.

평소 효성 또한 지극하였던 그는 어버이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돌아가시자 예법에 맞게 상을 치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894년(고종 31) 그는 곽지리를 둘로 나누어 서쪽 마을을 금성리(錦城里)라고 이름하고 독자적인 마을로 다스렸다. 강한 의협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일본인 중태랑(重太郞)곽지리금성리의 어장을 강제로 점령하고 착취하자 고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어장 보호운동을 펼치고 지역민들의 권익을 지켰다. 또 제주목사(濟州牧使)의 부탁을 받고 제주향교에서 경학(經學)과 시부(詩賦)를 강론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 후 1907년(융희 1)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그는 『좌전(左傳)』『삼도부(三都賦)』 등 소장하고 있던 책을 팔아 105냥을 헌납하였으며, 직접 거리로 나가 북을 치며 사람들이 운동에 동참하도록 고무시켰다. 이러한 그의 행적에 대하여 향리의 보고를 받은 군수 윤원구(尹元求)는 완문(完文: 조선시대 관청의 승인 문서)을 우선 작성하여 지역 사람들이 그의 효행과 덕행을 본받도록 장려하였으며 서울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효성까지 지극했던 그의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08년(융희 2) 4월 정3품을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도록 명하였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제주계록
증보탐라지
20세기제주인명사전
부천족보도서관(http://www.jokbo.re.kr/)
우리설화(http://plsia.cafe24.com/index.htm)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