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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景宗){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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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이윤(李昀)
자(字)휘서(輝瑞)
생년1688(숙종 14)
졸년1724(경종 4)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희빈장씨(禧嬪張氏)
단의왕후(端懿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처부심호(沈浩)
처부어유귀(魚有龜)
묘소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상세내용]

경종(景宗)
1688년(숙종 14)∼1724년(경종 4). 조선 제20대왕. 본관은 전주(全州). 재위 1721년∼1724년. 이름은 이윤(李昀), 자는 휘서(輝瑞).

숙종의 아들이다. 모친은 희빈 장씨(禧嬪張氏). 비(妃)는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 계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1689년(숙종 15) 원자(元子)로 정호되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그 상조론(尙早論)을 주장하다가 사사되고 민비(閔妃)가 폐출되었다.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고 생모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694년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어 1701년 사사되었다. 세자는 이때부터 질환이 있었으며, 1717년 숙종은 세자의 다병무자(多病無子)를 걱정하여 몰래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그해 세자대리청정(世子代理聽政)을 명하였는데, 소론측은 세자의 흠을 잡아 바꾸려 한다 하여 반대하였다. 이로부터, 그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즉위한 이듬해인 1721년(경종 1) 그의 다병무자를 이유로 건저(建儲)의 논의가 일어나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게 하였고, 이어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의 소(疏)에 따라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자 왕의 보호를 명분으로 한 소론측이 크게 반발하여 철회하였다.

더욱이, 그의 질환이 점점 심하여 정무수행이 어려워지자, 국사의 현명한 재단(裁斷)도 기대할 수 없어 그 권위도 추락되었으며, 이를 기회로 권신(權臣)의 전횡과 당인(黨人)들의 음모가 더욱 심하여졌다. 그해 12월 김일경(金一鏡) 등은 세제대리청정을 제기한 조성복과 이를 봉행하고자 한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왕권교체를 기도한다고 모함하여 축출하고, 소론정권을 수립하는 환국을 단행하였다.

이어 1722년 3월 노론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하였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소론일파의 의도대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관련자 50여인을 처단하고, 그밖에 170여인이 유배 또는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로 노론을 일망타진한 소론이 그의 재위기간에 정권을 전횡하였다.

소론이 집권하자 1722년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따라 1717년 관작을 추탈당한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과 그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관직증시(官職贈諡)를 회복시키고, 그해의 흉작으로 각도의 연분사목(年分事目)을 개정하여 전세율을 낮추었으며, 삼남지방의 양전(量田)에 민원(民怨)이 있다 하여 이를 시정하였다.

1723년 긴급한 일이 있어 왕이 중신을 부를 때 발급하는 명소통부(命召通符)를 개조하였고, 서양의 수총기(水銃器: 消火器)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하였다.

또, 관상감에 명하여 서양의 문신종(問辰鐘)을 제작하게 하고, 독도(獨島)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혀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南九萬)『약천집(藥泉集)』을 간행하였다.

1724년 서원에 급여한 전결(田結)의 환수를 의논하였다. 세자 때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었으며, 재위 4년 동안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쳤다.

능은 의릉(懿陵)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景宗修正實錄
國朝寶鑑
景宗의 生涯와 施政에 대한 一考察(吳甲均, 淸州敎育大學論文集 13, 1976)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