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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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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이돈(李焞)
자(字)명보(明普)
시호(諡號)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
생년1661(현종 2)
졸년1720(숙종 46)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명성왕후(明聖王后)
처1인경왕후(仁敬王后)
처2인현왕후(仁顯王后)
처3인원왕후(仁元王后)
처4희빈장씨(禧嬪張氏)
처부1김만기(金萬基)
처부2민유중(閔維重)
처부3김주신(金柱臣)
외조부김우명(金佑明)

[상세내용]

숙종(肅宗)
1661년(현종 2)∼1720년(숙종 46). 조선 제19대왕. 재위 1675년∼1720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돈(李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모친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초비(初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현종 8)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의 정국형세를 살펴보면, 왕의 즉위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허견(許堅)의 역모와 관련되어 남인이 실각(庚申大黜陟)하고 서인이 집권하였으며, 다시 1689년(숙종 15)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일의 경종)에 대한 세자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다가(己巳換局), 1694년 남옥(濫獄)이 문제되고 폐출되었던 민비(閔妃)를 복위시킴을 계기로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되며, 그대신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甲戌換局) 연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뒤에도 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추어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잦은 정권교체와 함께 복제(服制)에 있어서 송시열(宋時烈)의 오례문제(誤禮問題)를 둘러싼 고묘논란(告廟論難), 김석주(金錫胄)김만기민정중(閔鼎重) 등 외척세력의 권력장악과 정탐정치에 대한 사류(士類)의 공격에서 비롯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공방, 존명의리(尊明義理)와 북벌론(北伐論)의 허실을 둘러싼 노론‧소론 사이의 명분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야기된 왕과 신료(臣僚)들간의 충돌, 그리고 송시열윤증(尹拯)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회니시비(懷尼是非), 왕세자와 왕자(후일의 영조)를 각기 지지하는 소론‧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 사상(史上)에 저명한 정치쟁점으로 인하여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前代)에 비할 수 없으리만치 격심하였다.

남인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서인 역시 노론‧소론으로, 그리고 노론이 다시 화당(花黨)‧낙당(駱黨)‧파당(坡黨)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집산이 무상했으며, 이러는 와중에서 윤휴(尹鑴)허적(許積)이원정(李元楨)송시열김수항(金壽恒)박태보(朴泰輔) 등 당대의 명사들이 죽음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이러한 정쟁 격화는 붕당정치의 말폐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또 한편 앞서 현종 때의 예송논쟁을 통하여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왕은 군주의 고유권한인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을 행사, 환국(換局)의 방법에 의하여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치세기간 신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정비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우선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황해도(1717)에까지 실시, 그 적용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선조 말년 이래의 계속사업을 일단 완성하였고, 또 전정(田政)에 있어서 광해군 때의 황해개량(黃海改量)에서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 추진, 강원도(1709)와 삼남지방(1720)에 실시함으로써 서북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상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주전(鑄錢)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호조공조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개성부, 평안전라경상 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왕의 치세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경제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발달과 사회경제적 발전에 적지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 대외적인 특별한 긴장관계는 없었지만 국방과 군역문제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조처가 취하여졌는데, 먼저 대흥산성(大興山城)황룡산성(黃龍山城) 등 변경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으며, 특히 영의정 이유(李濡)의 건의에 의하여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거점으로 삼게 하였다.

효종대 이래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군제개편을 완료하였다.

당시 민폐의 제1요인이던 양역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호포제(戶布制)실시를 한때 추진하다가 양반층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함으로써 1필에서 3,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는 양정(良丁) 1인의 군포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하였다.

또 대외관계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자성(慈城) 2진(鎭)을 설치, 옛땅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조선인의 압록강연변 출입이 잦아지면서 마침내 인삼채취사건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분쟁이 일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 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으며,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출입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의 귀속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한편, 왕의 치세는 정치적으로 명분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던 탓에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大報壇)이 세워지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들이 복관되며,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姜氏)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관계를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개소의 서원 사우가 건립되고 131개소가 사액되는 남설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璿源系譜)』『대명집례(大明集禮)』『열조수교(列朝受敎)』『북관지(北關誌)』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大典續錄)』『신증동국여지승람』『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등이 간행되었다.

왕은 민비희빈 장씨의 예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그것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신료간의 붕당정치하에 견제받고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양역변통문제에 대한 해결 시도에서 나타나듯 민생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인 면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동요된 사회에 대한 수습과 재정비의 과정을 일단 마무리지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존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이며,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黨議通略
韓國黨爭史(成樂熏, 韓國文化史大系 Ⅱ, 1965)
朝鮮時代政治史의 再照明(李泰鎭編, 汎潮社, 1985)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대표명숙종(肅宗){2}
능호명릉(明陵), 익릉(翼陵)
돈(焞)
묘호숙묘(肅廟), 숙종(肅宗), 숙종대왕(肅宗大王),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운독경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運篤慶章文獻武敬明元孝大王),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協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명보(明普)

능호 : "명릉(明陵)"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3寧府事驪陽府院君贈領議政文貞公維重女 顯宗八年丁未四月二十三日誕降辛酉封王妃辛巳八月十四日昇遐旡嗣 明陵同原繼妃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金氏籍慶州領敦寧府事慶恩府院
紀年便攷v3因 命文臣爵二品年七十以上者親臨錫宴于便殿庚子六月八日昇遐在位四十六年春秋六十有 晬容七本有六男二女明陵高陽敬陵東岡甲坐妃光烈宣穆惠聖純懿孝莊明顯仁敬王后金氏籍光州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贈領議政文忠公萬基女
紀年便攷v3事慶恩府院君贈領議政孝簡公柱臣女 肅宗十三年丁卯九月二十九日誕降壬午封王妃丁丑三月二十六日昇遐旡嗣 明陵大王陵右岡乙㘴嗣景宗大王 玉山府大嬪張氏誕生第一序居嗣英祖大王 毓祥宫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崔氏誕生序
紀年便攷v4己丑忠定王元年至正九年元命忠惠王子眡入朝○葬明陵○元命眡嗣王位命鐡城君李君侅聴断國務○至至自元是日卽位○大風雨城中屋瓦盡飛儀鳯樓頹松嶽龍首両山松盡拔
紀年便攷v27事軆未安還寢志述竄配之命也○立何蕃唐人陳東歐陽澈并宋人祠宇于泮宫大行朝有成命而以歲儉今始營建○十月葬明陵在高陽行狀李観命撰誌文李頣命撰濟州三邑民百餘人請執役於因山且獻土産許其請而却其獻優賜粮米而送○正言趙
紀年便攷v28曰死生之除可無奉告惟以先大爺臨命不亂仰勉有四言詩死生常理惟義之適刀鋸袵席奚避奚擇惟公一生只知有國歸拜明陵庶幾無怍答曰千里被逮僇辱備至反不如一死之為榮今到星山始聞有後命其亦幸矣何待台教而自勉於就死之地乎台適
紀年便攷v30李健命特汲引於朝麟祥以徑進辭首發宋時烈宋浚吉從犯之論與尹志述為莫逆交庚子大喪聯章定行三年制後又同請改明陵誌文與郭守杰等即為捲堂醜正之徒至有跡投凶門名參述䟽等語遂决意南歸仍不出英祖癸未以優老陞通政官止同中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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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