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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金萬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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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김선생(金船生)
중숙(重淑)
서포(西浦)
시호문효(文孝)
생년1637(인조 15)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익겸(金益謙)
증조부김장생(金長生)
외조부윤지(尹墀)

[상세내용]

김만중(金萬重)
1637년(인조 15)∼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김선생(金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1. 성장기의 가정환경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요, 충정공(忠正公) 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이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이다.

그의 모친은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윤방(尹昉)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윤지(尹墀)의 딸인 해평 윤씨이다. 그는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정축호란(1637)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었기 때문에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그 좋은 예로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고,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소학』『사략(史略)』『당률(唐律)』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같은 여러가지 면들, 즉 연원있는 부모의 가통(家統)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 관계 등용 후의 행적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뒤 1665년(현종 6)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디디기 시작하여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에 지평(持平)수찬(修撰)을 역임하였고, 1668년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교리(校理)가 되었다.

1671년에는 암행어사신정(申晸)이계(李稽)조위봉(趙威鳳) 등과 함께 경기삼남 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 돌아와 부교리가 되는 등, 1674년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675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이 점차 수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의 형 김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2차 예송(禮訟)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에 남인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이 사사(賜死)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시에 사헌부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되었다.

3년 뒤인 1686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인 1687년에 다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난 1688년 11월에 배소에서 풀려나오기는 했으나 3개월 뒤인 1689년 2월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의 여화(餘禍)때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으나,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고,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3. 사상‧문학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와서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치게 되지만,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본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기도 했지만 가문의 훌륭한 전통 등으로 인해 그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를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朱熹)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정한 한계는 있겠으나,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주목받아 마땅한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한문은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이소(離騷)」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개명적 의식(開明的意識)의 소산으로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요즈음에 와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만중이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사조상의 공로는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용어 사용이 적절한 것인지는 재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러하든 그가 살던 시대는 분명 중세의 봉건질서가 붕괴된 시대는 아니었던 만큼 국민문학이라는 용어도 성립할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적어도 ‘국민문학론’이 제창되는 것은 조선왕조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나 가능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사용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종의 ‘국자의식(國字意識)’은 충분히 강조될만하며, 더구나 그가 「구운몽」‧「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볼 때, 허균(許筠)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는 시가에 대해서뿐 아니라 소설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김만중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삼국지」사마광(司馬光)『통감(通鑑)』,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誌演義)」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문선(文選)』의 시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율시(律詩)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점은 자못 특징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하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고시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인 「단천절부시(端川節婦詩)」 또한 이러한 그의 주정적 시가관(主情的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도 흥미있는 현상으로 보이는바, 그의 낭만주의적 정감의 전달대상으로 선택된 것 같다.
4. 연구전망
지금까지 국문학연구자들 사이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구운몽」‧「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국문소설이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와서 그의 시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효에 있어서 비교적 다른 인물보다 많은 연구논문들이 생산되었으나 아직도 새롭게 고찰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고 믿어진다.

예컨대 그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보는 문제라든가 소설과 시가 사이의 관계, 또는 그의 사상의 진보성과 한계 등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방면에서의 축적된 연구성과 위에 김만중과 그의 문학이 문학사적 전망 속에서 보다 뚜렷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西浦文集
西浦漫筆
金萬重(李明九,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6)
西浦의 漢詩考(金戊祚, 又軒丁仲煥博士回甲紀念論集, 1974)
西浦評論硏究(金周漢, 嶺南語文學 3, 1976)
九雲夢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西浦漢詩硏究(趙鍾業, 語文硏究 9, 1976)
金萬重(趙東一,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지식산업사, 1979)
西浦漫筆에 나타난 批評의 特性(崔信浩, 韓國學報 25, 一志社, 1981)
金萬重硏究(丁奎福, 새문社, 1984)
金萬重文學論硏究(尹浩鎭, 韓國學大學院석사학위논문, 1982)
西浦의 漢詩硏究(權永大, 高麗大學校大學院석사학위논문, 1984)

[집필자]

정규복(丁奎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