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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빈(金克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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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600(선조 33)
졸년1628(인조 6)
시대조선중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부마
김이원(金履元)

[상세내용]

김극빈(金克鑌)
미상~1628년(인조 6). 조선 중기 부마.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증조부는 김덕유(金德裕)이고, 조부는 김홍우(金弘遇)이다. 부친은 선조와 광해군 대에 경기도‧충청도‧경상도‧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대사헌(大司憲) 등 대간직과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의 고관직을 역임한 김신원(金信元)이다. 모친은 김광열(金光烈)의 딸 김씨이다. 삼촌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임명 문제로 심의겸(沈義謙)과 문제가 생겨 동인(東人)의 당을 이룬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이다.

1611년(광해군 3) 선조(宣祖)와 후궁 정빈민씨(靜嬪閔氏) 소생인 정근옹주(貞謹翁主)와 혼인하여 부마(夫馬) 일선위(一善尉)가 되었으나, 혼인 2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정근옹주가 1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대신들과 종친이 모인 자리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할 것에 관해 논의할 때 폐위문제는 조정에서 논의하기에 달렸다고 고하였으나 결국 다음해 우의정 한효순(韓孝純) 등과 함께 폐모론을 주장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다. 1619년(광해군 11)에는 대북세력인 좌의정 박홍구(朴弘耉)‧병조판서 유희분(柳希奮)‧판돈녕부사 민형남(閔馨男)‧문평군(文平君) 유공량(柳公亮) 등과 함께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게 해달라고 대궐 뜰에서 요청하였다. 1624년(인조 2)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2등 공신에 임명되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좌천된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문회(文晦)‧이우(李佑)‧권진(權聄) 등이 이괄이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미리 고발하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전라감사(全羅監事) 이명(李溟)‧병사(兵使) 윤숙(尹璛)‧강원감사(江原監事) 윤안국(尹安國)‧수원부사(水原부사) 이경립(李景立) 등이 이에 내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인성군 이공은 정근옹주의 형제로 김극빈의 매부(妹夫)였으므로 김극빈도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1628년(인조 6)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의 조카로서 북인(北人)정권에 참여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제천(堤川)으로 유배되었던 유효립(柳孝立)이 인조반정 이후 실세한 허유(許逌)‧정심(鄭沁)‧김탁(金鐸)‧유두립(柳斗立) 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 일이 허적(許𥛚)의 고변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의금부(義禁府) 서리(胥吏)인 이수향(李秀香)이 반역의 무리가 인성군 이공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김극빈도 동모했다고 고변하였다. 또한 반역의 무리 중 민대(閔濧)는 반역의 대장이 일선위 김극빈이라고 고했다. 결국 김극빈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죄를 자복하지 않고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