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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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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숙헌(叔獻)
호(號)석담(石潭)
호(號)우재(愚齋)
시호(諡號)문성(文成)
생년1536(중종 31)
졸년1584(선조 17)
시대조선전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학자 > 유학자
아명현룡(見龍)
이원수(李元秀)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
처부노경린(盧慶麟)
저서『성학집요(聖學輯要)』
저서『격몽요결(擊蒙要訣)』
저서『학교모범(學校模範)』

[상세내용]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부친은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1. 가계와 수학
출생하던 날 밤 어머니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날아들어와 서렸다고 하여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죽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19세에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20세에 하산하여 강릉으로 들어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1세에 문과 초시인 한성시(漢城試)에 대책으로 장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겨울에 문과 별시 초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다. 1564년(명종 19) 29세에 진사 초시, 생원 초시에 장원하였고, 갑자(甲子) 식년 문과 초시에 장원하였다. 또 생원 복시에 장원하였고, 진사 복시에는 3등 12위로 합격하였다. 이어서 식년 문과 복시와 전시에 연이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 관직과 저술
29세에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되고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을 논하였다. 34세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고,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으며, 40세 때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제진하였다. 42세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고, 45세에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었다. 이해에 「김시습전(金時習傳)」과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3. 사화와 사회경제
1545년 을사사화로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자, 사림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正大妃)가 죽고 20년간 권력을 휘두르던 윤원형(尹元衡)일파가 몰락하자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이가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6년에는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사액하였으며,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해 6월에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며, 8월에는 을사사화로 처벌 받았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등용하였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삭탈,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진, 1569년(선조 2)에는 이이의 「동호문답」 제진, 그리고 1570년에는 유권(柳灌)유인숙(柳仁淑)의 역명신원(逆名伸寃) 등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상황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폐단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 분당으로 인하여 사림은 분열되고 정쟁으로 인해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4. 성리사상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하여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이이와 같은 인물이 조정에 나와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하여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였다. 경장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가능하다 함에 대하여는 이미 조광조도 강조한 바 있거니와, 그 시대에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었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이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하는 이이에 있어서 항상 강조되는 것은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니, 언제나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강조하였다.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같이, 이이에 있어서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에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5. 학문과 업적
이이는 시대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였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하여 개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하여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정치는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요, 언로를 개방하고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에게 있어서도 그러하였지만, 이이에게 있어 언로는 국가흥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지식인 관료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이이는 그의 논의에 있어서 항시 실사와 실공에 토대를 두었던 것이며, 이렇듯 성리와 실사, 의리와 공리, 인간과 사회, 이념과 현실, 실사와 원리 등 형이상하와 내외본말을 적의(適宜)하게 갖추었던 그의 사상이 성리학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단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구체적인 시책 속에서 시(是)와 이(利)를 하나로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의 양면은 후기에 있어서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의리와 실리가 조화를 이루는 바 연관성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양자가 균형을 얻지 못하고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오늘에 있어서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함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었다.

[참고문헌]

栗谷全書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栗谷의 思想(李俊浩編, 玄巖社, 1973)
栗谷의 生涯와 思想(李丙燾, 瑞文堂, 1973)
退溪栗谷哲學의 比較硏究(蔡茂松,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思想史論攷(朴鍾鴻, 瑞文堂, 1977)
韓國哲學硏究 中(韓國哲學會, 東明社, 1978)
朝鮮儒敎淵源(張志淵著, 柳正東譯, 三星文化文庫, 1979)
栗谷의 性理學과 社會哲學(李東俊, 韓國思想史大系 Ⅳ,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4)
韓國哲學史 中(韓國哲學會, 東明社, 1987)
栗谷哲學의 根本精神(柳承國, 東洋哲學硏究, 東方文化硏究院, 1988)
栗谷의 哲學思想硏究(宋錫球, 螢雪出版社, 1987)
栗谷哲學硏究(黃義東, 經文社, 1987)
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9)

[집필자]

이동준(李東俊)

호 : "율곡(栗谷)"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3李珥德水人監察元秀子荇再從孫申命和外孫中宗丙申生字叔獻號栗谷又愚齋又后潭其母夢黑龍抱兒入懷中而生故小字見龍三歲見石榴曰所謂石榴皮裡碎紅珠者也七歲位陳復昌傳畧曰君
紀年便攷v27荅者出則真箇甚於仇讐其語及先人䖏用意誣掐多有不忍見者拯抵書史局曰今人或欲以江都事訾病先人者卽何異於指栗谷以妄塞悲之䟽謂之自道盡之者耶栗谷則猶未免真有入山之失而先人之不死則初旡可死之義荅羅良佐書曰其時椎金二
紀年便攷v27用意誣掐多有不忍見者拯抵書史局曰今人或欲以江都事訾病先人者卽何異於指栗谷以妄塞悲之䟽謂之自道盡之者耶栗谷則猶未免真有入山之失而先人之不死則初旡可死之義荅羅良佐書曰其時椎金二公隷在南門故得与仙源同焚不然則亦
國朝人物志v1簡令命和書之曰托以微恙可也命和正色曰過情之語不可告人終不肯書人物考外孫李珥號栗谷
國朝人物志v2不可其後十年朋黨禍起爲國大蠹以此觀之退溪李滉製敎文有曰學究天人沈機先物蓋有實見得於公而若使栗谷早知公則必不以詆公矣尹孤山集兒時與南冥曺植同學山中其嬉戲嘗以安社稷自期謂南冥
國朝人物志v2山水盡城中奇異之觀中年作亭漢濱扁以水月日邀騷人韻士觴詠偕樂當世名儒如退陶南冥東洲北窓栗谷牛溪諸先生咸敬重之其筆迹散在金石嘗自言吾所書康陵誌文最是着意筆他書皆不及上同南冥赴
國朝人物志v2字叔獻號栗谷德水人父監察元秀娶進士平山申命和女生珥于江陵府夢黑龍入室抱兒懷中小字見
國朝人物志v2翼弼知科擧之外有用心處遂取性理諸書日夕講討不由師承刃解氷釋至其論說理致通透洒落無所礙滯栗谷嘗入場屋對天道策謂來問者曰宋雲長高明博洽宜就問之於是擧場奔波翼弼左酬右應愈扣而愈無窮
國朝人物志v2以科事爲屑誠孝出天日必冠帶參拜祠宇奉養偏慈盡其敬愛未嘗以褻服侍側前後強仕皆爲親屈每設壽席牛溪栗谷必偕至升堂稱觴盡歡而罷生理蕭條日不暇給家人生業了不關心在縣棄歸必倒箱篋恐其留物平居簞瓢屢空
國朝人物志v2之名不遠千里而往從窮喪無告者力救之自號四耐耐困耐飢耐寒耐暑也名山大川無所不往出入晦齋退溪栗谷牛溪之門又與南冥蘇齋遊東儒師友錄
國朝人物志v2恭曾孫戊子生員進士庚子文科左參贊襲封牙善君人物考子雲海字景游與牛溪栗谷爲道義交官止郡守雲海子夢鱗夢濂俱以文行知名
國朝人物志v2德輿終身悲病撫其孤不啻己兒己卯朝論携貳栗谷李珥爲所攻白仁傑上章論時事其打破東西一款實栗谷意也言者將論栗谷代人代疏德輿以諫長獨啓以爲所論果是則雖代述何妨乃引程子代彭思
國朝人物志v2安彭壽女生澈于漢陽十歲父罹乙巳士禍流落南方從金河西麟厚奇高峯大升學稍長與栗谷牛溪相友善辛酉進士明宗壬戌文科壯元爲持平退溪李滉稱有古諫臣風歷玉堂修撰宣
國朝人物志v2科錄扈聖功臣封全陽府院君庚寅拜右議政至領議政與洪汝諄鄭仁弘金大來李弘老共斥栗谷牛溪削奪官職光海戊申竄慶興大臣率二品以上啓請賜死從之癸亥仁祖反正伸雪相臣錄
國朝人物志v2子孫以扶餘爲貫有文武全才甲子生員宣祖己巳文科歷修撰承旨出補義州牧使上疏救栗谷被誣人物考曾孫必遠文科判書
國朝人物志v2生員明宗癸亥文科選入史局賜暇湖堂至大司成少時詩格筆法超絶流輩與月汀柏潭松江栗谷高峯白麓定爲道義之交情義甚篤癸未拜大司諫時宋應許篈朴謹元等竄逐上特命李珥
國朝人物志v2汝立令是聽其父爲宰每咄咄不已丁卯進士庚午文科修撰從栗谷李珥遊嘗曰紫陽已熟底杮子栗谷半熟底杮子及珥卒汝立以臺諫力詆栗谷上曰汝立今之郉恕汝立棄官歸讀書自號竹
國朝人物志v2謂可與興至治信乎知人則哲堯亦難之上怒斥爲長淵縣監又號荷衣子有文名人物考栗谷嘗過荷衣家見其所著詩落花高下不齊飛之句曰有何不平底意思荷衣曰方與玉堂諸僚治疏劾公故不覺
國朝人物志v2人文肅公崇善玄孫明宗丙辰文科歷翰林官至吏曹判書入耆社倜儻奇偉世稱名臣事載栗谷經筵日記國朝榜目
國朝人物志v2終日婦女不敢近居官簡約有不慊意輒棄歸其詩格入律峻整八歲能屬對句驚人從辟儐幕提衡槐院本由栗谷論薦再使燕京官止參議贈禮曹參判子韠號石洲碑銘以下牛栗親灸人人物考
國朝人物志v2嫁孤貧者數人外姊適人無後而亡繼其室者久食田不肯還公告母夫人推與太半奴婢二十七口田九石許其自擇栗谷李叔獻每心服之爲察訪時被檄監麟邑租號令明肅條敎詳盡吏卒植立無敢喧譁民大悅趨之不數日畢
國朝人物志v2同僚席熟知其不然以不能直冤爲愧辛巳牧黃州栗谷李公以擯使往迎明使時高敬命許篈以從事從栗谷至州詩酒相歡許篈嫉之還朝嗾臺諫彈以不根之說上問栗谷栗谷對以無有上以論事不
國朝人物志v2仁涵子幼時不與群兒戲凜然早成常有蜂入懷而螫焉於課學整疊其書從容起居解衽脫放之時僅七歲稍長遊栗谷牛溪門旣而時論大變酷被誣詆弘立不樂交游常閉門自守辛丑進士時太學欲爲牛溪伸白諸生畏忌莫
國朝人物志v2字時中江華人壬子生員官止縣監與栗谷生同鄕里早有求道志往謁退溪于陶山得聞古道又登灸于坡山牛溪甚推許焉往來講磨益知用心處
國朝人物志v2玄孫早失所怙執喪盡禮幾滅性事母極孝溫凊之奉甘旨之供必親其手性好學窮經不屑屑於科業以故不第與栗谷牛溪相友善栗谷秉銓勸之仕不肯貽書示其意墓碣
國朝人物志v2心有所疑及孝元登第聲名日盛義謙屢遏淸選後孝元又屢招當時浮薄之徒造言生事顯有分黨之漸栗谷憂之建請兩出以爲鎭定之計出爲開城留守仁弘最嫉之爲掌令欲劾義謙時栗谷爲都憲
國朝人物志v2之宣廟初元相臣請擧經明行修之士雲海以六行俱備與成運等被選與牛栗兩公講磨道義栗谷常稱以畏友行狀子夢鱗夢溓
國朝人物志v2明宗之喪五月疏食三年不飮酒及倭寇作見國事顚危益自慷慨以至流涕觀者易容焉嘗從李潑見其盛稱栗谷未幾黨論起反肆醜詆鳳男遂責而絶之墓銘
國朝人物志v2字尙之驪興人承旨世良子戊辰生員壬午文科左承旨性簡率朴古不喜芬華與栗谷契分最深嘗喟然曰吾老矣又奚爲於塵埃間遂閉門索居邈然無榮進意在瑞興郡守時接待明將事以辦治褒
國朝人物志v2鄭澈被禍殷輝亦幾中奇禍朝廷改定貢案用薦入戶曹遂辭不就少從秋巒鄭之雲聞爲學之方栗谷雅重之曰可與共國事者也鄭汝立方盜時名殷輝惡其爲人屢指斥友人宋翼弼遘禍無所歸殷輝
國朝人物志v2宣祖嘗加愛賞以草訣百韻手題冊額而賜之在郡不任刑杖吏民愛戴丁憂廬墓親執洗皿冬月手爲皴裂栗谷歿妻子飢寒朝廷爲授縣職以養之盡心撫育未嘗自營產業故其所畢命梅鶴亭者亦其婦家別業也在槐
國朝人物志v2字景徽密陽人栗谷門人乙酉進士戊子文科府使
國朝人物志v2字士振豐川人丙子司馬官止直長性勁直操履甚確聞有好學篤行者必往交遊牛溪栗谷門爲士類所推重癸未栗谷被三司論劾牛溪幷被詆斥鐸時掌議太學倡諸生抗章伸救居父憂廬墓哀毀踰
國朝人物志v2字子方高靈人用漑孫壬午司馬官至工曹參議封靈川君公年十八學于牛溪從栗谷問業一時勝流皆折行輩與交崔有源等告臨海君謀逆事甚暗昧欲籍重引公爲說遂錄勳籍深恥之屢疏請
國朝人物志v2字士誠靑松人監役偰子參贊光彥孫官止府使謙愼自牧斂華就實蔚然稱寬厚長者從栗谷牛溪學碣銘弟宗敏
國朝人物志v2稱當世第一流十三以三都賦謁朴思菴大奇之名遂大振世言李家有文章兒公卿大夫皆願一見爲修撰時栗谷方典文衡宣廟謂曰近日欲講綱目可選年少才聰臣數人以進備顧問命下朝延拭目栗谷進三人
國朝人物志v2字子正號玉溪龍仁人庚寅司馬官止縣監少學於朴守菴枝華又服事栗谷名誼文術爲一時士友所推許倡義兵與洪可臣討平李夢鶴所居洗心臺泉石之勝甲於都中光
國朝人物志v2於東岡南彥經弱冠作持敬指南圖安東權應寅以學術名見而奇之曰退溪後誰能作此後師事栗谷又往拜牛溪又深究醫理其精透微妙非俗醫可及濟人甚多壬辰亂後因求言陳疏數千言體素齋李春英
國朝人物志v2字天衢德水人甲申以賢良擧之官止郡守栗谷再從弟也九歲考執義公遘疾將終使之受學於栗谷且貽書以勉焉天姿剛潔聲如巨鍾御下凜然有不可犯
國朝人物志v2字仲高號碧山又號葛裘完山人寺正彥怡子己卯生員庚辰文科從栗谷牛溪有所質問操戈入室二先生樂其相長期以遠器識度夙成發韌趨正衆論膠擾必主乎善朋儕推重咸歎不
國朝人物志v2寅文科大司憲封海川君幼時從祖母錫以衣需有源語諸姆辭不取祖母大奇之知他日有氷蘖之操遊栗谷門極稱許以爲辭氣端嚴他日必爲遠器以立志希聖之學誘掖甚切後見鄭寒岡問變化氣質云者身心內外
國朝人物志v2秀號休庵安東人寺正元孝子璠曾孫壬午進士庚寅文科刑曹參判弱冠擧發解第二名時栗谷秉文衡亟稱之名聲由是益著戊申奸臣請廢母后百僚怵懼奔走獨不詣列光海問金某曷爲不參
國朝人物志v2去就則截然有不可奪者尤以隨人俯仰爲恥嘗言鄭介淸始事朴思庵淳後乃背之偉男以此仕途枳焉從栗谷學宣廟末年都下訛言寇至士夫家爭門走出偉男上疏曰君父在此疇敢先去請梟示城門俄而
國朝人物志v2字善慶乙酉中司馬兩試官至參奉弱冠才業蔚然於文辭筆翰無不能焉內行甚備游栗谷牛溪門往來問學與金仙源黃秋浦李體素相善爲文章友誌銘
國朝人物志v2字舜卿號松厓沔川人高麗沔川君述煕後郡守居信曾孫受業于栗谷龍蛇之役大駕西狩汝龍痛哭募兵得五百人與趙公光玹兼程勤王奔問行在其奮忠捍國者如此授
國朝人物志v2字淑夫號松庵昌原人參奉必成子炯孫丙子司馬與栗谷共生於江陵少栗谷六歲及長師事栗谷至心服勤壬辰以宗廟直長奉太廟十室神主
國朝人物志v2字彥沈海州人郡守汝雨子九歲辭家負笈往海州從栗谷受詩史筆追懷素詩類靑蓮餘事音律傍通繪事凡諸曲藝各臻其極世稱神童聞家人殺鷄聲惻然却不食乙丑進士
國朝人物志v2字君珍號蟠松主人順興人寓居石潭年七十與二子興宗光宗從栗谷學丁酉進士官縣監壬辰爲倭所害人物考校理謹厚曾孫壬亂子光宗以身捍蔽替受其刃父子同
國朝人物志v2字士重豐川人牧使夢臣子癸未文科師事栗谷牛溪檢身若不及朝夕省飭時望甚重時倭釁已啓而朝廷恬嬉鉉憂念國事作詩有杜宇聲中氣自南默觀時事
國朝人物志v2南原人知事又新子母夫人柳氏得異夢生暹嘗啼聲甚急母急就抱持纔出戶而壁忽頹人皆異之從栗谷學及栗谷牛溪被誣暹極力伸辨壬辰寇至李鎰爲將暹友人爲其從事當行暹謂鎰曰此
國朝人物志v2字期中號水心堂坡平人生員彥誠子栗谷門人癸酉進士乙未文科以年八十陞嘉善同知中樞府事封坡興君國朝榜目趙庭堅字公直號
國朝人物志v2壬午進士丁酉文科丁巳以通信使東赴日本光海癸丑力爭追崇廢母之非又守正卞誣請伸牛溪栗谷兩賢之被詆仁祖初服首膺召命拜右相至領議政入耆社年七十八卒諡忠貞國朝榜目弟
國朝人物志v2字伯胤號梨川定宗別子宣城君茂生五世孫郡守克仁子天資絶高少受學于栗谷牛溪之門終日危坐略無倦容宣祖壬午進士甲午文科歷三司判禮曹時方議追崇弘胄辭曰
國朝人物志v2字玉汝號默齋延安人承旨嵕孫宣祖壬午生員從學于栗谷之門爲師卞誣世無其儔癸卯文科癸亥與金瑬等擧義奉仁穆大妃命廢出光海君立綾城君
國朝人物志v3飮食不聞下匙著聲已置匕有常處未或不正朝野輯要夫人兪氏松堂泓女不慧不能備夫婦之道遂娶栗谷庶女爲小室及兪夫人歿沙溪招愼齋語曰集爾今妻亡可以後娶豈非宗祀幸耶愼齋起拜曰命旣
國朝人物志v3字而愼坡平人丁卯進士仁祖乙亥太學發栗谷牛溪從祀之論時一邊人百般沮敗雖士類亦多却步惟謹獨毅然不動率多士叫閤官至戶曹正郞人物考
國朝人物志v3西盜起有戢捕功上嘉賜通政階爲成川守時叱罵淸譯鄭命壽終不加僇辱爲坡州守時有栗谷祠廟久而頹圮晉亮改而新
國朝人物志v3用乙丑有尹拯事自少師尤齋以所述父碑不滿望積憾成釁又以其父苟免於江都欲掩其累却謂栗谷眞有入山之失論者斥以背師誣賢則時輩靡然右拯詆侮及於尤齋壽興慨然陳達曰今之老成無過時
國朝人物志v3甲祚子雙淸堂愉八世孫降時父夢孔子至其家小字聖賚師事沙溪金長生盡得其所傳於栗谷者又專讀朱子書以成家嘗以爲天地之所以生萬物聖人之所以應萬事直而已孔孟以來相傳者惟是一直
國朝人物志v3兩黜沈金補外而許篈宋應漑朴謹元劾李珥反坐見竄及珥卒西人常困於東人朝象益潰裂東人謀攻栗谷不已者汝立及柳永慶洪汝諄李潑等也己丑汝立謀逆死李潑李洁辭連栲死鄭彥信彥
國朝人物志v3判書以嘗營赦趙嗣基謫洪原掌令安世徵覈請拿問遂圍籬鍾城庚辰宥還甲申卒年七十八有栗谷四七書辨愁州管窺錄洪範行義尊周錄新編入陣圖說永慕錄有七子三女諡文敬行狀子栽字
國朝人物志v3字君美平山人蔭仕至奉事景宗壬寅竄巨濟甲寅卒庚申邪黨方逞黜牛溪栗谷二先生于文廟君美偕諸生力爭尤庵宋時烈朝夕及禍又冒禍色往拜托以墓文人物考
國朝人物志v3魚思碧海睡鶴夢滄洲嘗以早年登科爲不幸辛丑以後不仕退修舊廬至老讀書鷄欲鳴則輒起誦念嘗曰靜菴栗谷我師也著四禮便覽三官記儒先錄
國朝人物志v3淸都事憲宗朝官至六曹參判嗜酒喜詩好遊名山水嘗擬傅奕靑山白雲人鄕里以山雲號之一日讀栗谷書恍然曰吾道在是乃以李延平草衣木食爲工夫之要遂廢煖突不覆衾飢餟松葉口誦手抄雖疾病旅行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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