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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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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이향(李珦)
자(字)휘지(輝之)
시호(諡號)공순(恭順)
생년1414(태종 14)
졸년1452(문종 2)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소헌왕후(昭憲王后)
현덕왕후(顯德王后)
처부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처부권전(權專)

[상세내용]

문종(文宗)
1414년(태종 14)∼1452년(문종 2). 조선 제5대왕. 재위 1451년∼1452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향(李珦), 자는 휘지(輝之).

세종의 맏아들이며, 모친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일찍부터 신체상의 각종 질환으로 1437년 벌써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群臣)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였고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하였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하였으며, 1445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문종은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시대의 정치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하여 약간 위축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종친(宗親)세력의 심상하지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한 언관(言官: 臺諫)의 종친에 대한 탄핵언론으로 상호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언관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斥佛言論)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세종의 호불적 경향(好佛的傾向)에 대한 유신(儒臣)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하여 이루어진 각종 불교행사와 내불당(內佛堂)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유자적(儒者的)인 언관(言官)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언관의 언론은 왕권이나 그밖의 세력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求言)하였고, 언로(言路)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朝臣) 6품 이상에 대하여는 모두 윤대(輪對)를 허락하였으며, 비록 벼슬이 낮은 신하에 대하여도 부드럽게 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문종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東國兵鑑)』『고려사』『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大學衍義註釋)』 등이 있다. 『고려사』정도전(鄭道傳) 등의 『고려국사(高麗國史)』 이래 여러 차례 개수(改修)‧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하여 1451년(문종 1)에 완성을 본 것이며, 기전체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왕조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문화의 정리를 위하여도 필요한 작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1445년에 10사(司)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하였다. 문종은 그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陣法)을 편찬하는 등 군정(軍政)에 관심이 많았는데,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하여 제시하였고, 재위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문종의 학문은 유학(儒學: 性理學)뿐 아니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및 산술(算術)에도 정통하였고, 예‧초‧해서(隷‧草‧楷書)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며, 능은 현릉(顯陵)으로 양주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世宗實錄
文宗實錄
璿源系譜
國朝寶鑑
燃藜室記述
集賢殿硏究(崔承熙, 歷史學報 32‧33, 1966‧1967)
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陸軍本部, 1968)
朝鮮初期言官‧言論硏究(崔承熙, 서울大學校한국문화연구소, 1976)
兩班儒敎政治의 進展(崔承熙, 한국사 9, 1974)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능호 : "현릉(顯陵)"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3月三日誕降辛丑册封王世子乙丑代理景泰元年庚午二月卽位壬申五月十四日昇遐在位二年春秋三十九有一男二女 顯陵楊州健元陵東岡癸坐妃仁孝順惠顯德王后權氏籍安東判漢城府事贈領議政花山府院君景惠公專女 太宗十八年三月
紀年便攷v3承徽封良媛丁巳純嬪奉氏廢遂册封世子嬪辛酉七月二十四日昇遐于東宮之資善堂文宗卽位追册為王后誕一男一女 顯陵大王陵左岡。寅坐初葬安山昭陵中宗八年改葬于此嗣端宗大王一女敬惠公主下嫁寧陽尉贈領議政鄭悰一女敬淑翁主
紀年便攷v7問曰男必盡死汝女也必生矣其奴泣而上之酒三問俯而飮之有詩曰食人之食衣人衣素志平生莫相違一死固知忠義在 顯陵松柏夢依依自乙亥以後祿俸别置一室書某年某月祿 肅宗辛未復官致祭贈謚忠文英祖戊寅贈吏判○妻金氏為官婢全
紀年便攷v7政南智右議政金宗瑞䓁受顧命輔佐集賢學士成三問朴彭年申叔舟李塏河緯地柳誠源䓁受世宗付託左右協賛○九月葬顯陵在楊州健元陵東岡行狀申叔舟撰又有誌文○命鄭夢周配食王氏廟○命經筵進講家禮喪制
紀年便攷v7閔伸寺尹不害子不貪從子文科官止吏判端宗癸酉被斬於 顯陵碑石所五子同殉謚忠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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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