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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辛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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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편조(遍照)
자(字)요공(耀空)
호(號)청한거사(淸閑居士)
생년?(미상)
졸년1371(공민왕 20)
시대고려후기
본관영산(靈山)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상세내용]

신돈(辛旽)
미상∼1371년(공민왕 20). 고려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담당하였던 승려. 본관은 영산(靈山). 승명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이며 왕이 내린 법호로 청한거사(淸閑居士)가 있다. 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이다.
1. 가계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고 영산에 무덤이 있었다는 것만이 확인될 뿐이며,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비(婢)였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 때문에 신분적으로 천한 위치에 있어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산방(山房)에 거처하였다.
2. 왕사로 국정관여
1358년(공민왕 7)에 왕의 측근인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신봉하였고 신돈 또한 총명하여 왕의 중망(重望)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라는 비난도 있었고, 심지어 정세운(鄭世雲)은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므로 왕이 피신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를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정치의 표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1364년 두타승(頭陀僧)이 되어 공민왕을 내알(來謁)하고 비로소 궁안에 들어와 용사(用事)하게 되었다. 이때 왕으로부터 청한거사라는 호를 받고 사부가 되어 국정을 자문하였는데 왕이 따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그로 인하여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마침내 1365년 5월에 최영(崔瑩)을 비롯하여 이인복(李仁復)이구수(李龜壽) 등을 거세하면서 세력을 쌓았으며, 같은해 7월에는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진 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山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에 이르렀다.

그가 이렇게 등용된 배경은 벌족세신(閥族世臣)은 친당(親黨)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고 신진은 이름을 낚으며 유자(儒者)는 유나(柔懦)하고 강기(剛氣)가 적은 데 비하여 신돈은 도(道)를 얻고 욕심이 적으며 미천하여 친당이 없으므로 큰 일을 맡기어도 소신껏 국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개혁지향적인 공민왕의 판단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그의 등용을 공민왕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저지른 실정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영도첨의사사사가 된 뒤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중국에는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백관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다.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내외의 권력을 총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을 대신하여 백관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출입할 때는 의위(儀威)가 왕의 승여(乘輿)와 비슷할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과 지위는 왕권의 의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을 뿐 그의 독자적 세력기반을 구축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신분적 제약과 불확실한 수도과정에 비추어볼 때 불교계에도 지지기반을 가질 수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영향력이 컸던 고승 보우(普愚)로부터는 사승(邪僧)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3. 개혁정치
신돈의 집권기간 동안 이루어진 시책으로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의 설치와 활동을 통한 개혁적인 정책을 들 수 있다.

1366년 5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게 하고 스스로 판사(判事)가 되어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권문세가들이 탈점했던 전민(田民)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성인이 나타났다.”라는 찬양을 받기까지 하였다.

1367년 숭문관(崇文館)옛터에 성균관을 중영(重營)할 때 직접 그 터를 살피고 “문선왕(文宣王: 孔子)은 천하 만세(萬世)의 스승이다.”라고 하면서 문신들이 품질에 따라 포(布)를 내어 추진하는 이 사업에 적극성을 보여 마침내 완성을 보아 유술(儒術)을 중흥시키려는 공민왕의 의욕에 부응하였다. 그리고 그해 『도선비기(道詵祕記)』를 근거로 하여 왕에게 천도할 것을 건의하고 스스로 평양에 가서 상지(相地)까지 하였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4. 신돈의 제거
신돈의 등용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많은 물의가 있었다. 일찍이 이제현(李齊賢)이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 흉인(凶人)의 것과 같아 후환을 끼칠 것이라 하여 왕에게 가까이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며, 1366년에 간관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탄핵을 하다가 도리어 폄축(貶逐)을 당하기도 하였다.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김원명 등이 제거하려고 밀의(密議)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하였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류되던 도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한편, 기거하던 기현(奇顯)의 집에서 독립한 1367년부터는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 비난이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1369년 스스로 5도(道)의 도사심관(都事審官)이 되려고 사심관을 부활시키려다가 좌절되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립시키려고 시도하였던 일로 보여진다.

1370년 10월, 그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親政)할 뜻을 밝혔고, 1371년 7월 마침내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붙잡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일당 기현‧이춘부(李春富)이운목(李云牧) 등과 함께 복주(伏誅)되었다.
5. 평가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나타났던 특이한 현상이다. 집권기간은 6년 정도에 불과하며, 정치적 지위도 전적으로 왕권의 비호 아래 얻어진 비정상적인 것이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자질이나 식견도 보잘것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집권기간중에 권문세가의 유력자들을 거세시키면서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개혁적인 시책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성균관을 중영하여 신진문신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고 하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신진문신세력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공민왕의 개혁정치 전반과 관련하여 각별히 유의할 점이다.

또한,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뒷날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워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 아래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추대한 정변과도 간접적인 관련을 가지게 됨으로써 조선의 건국과정을 통하여 그의 집권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辛旽考(姜裕文, 佛敎 6‧7‧9‧10‧11, 1938)
辛旽(閔丙河, 人物韓國史Ⅱ, 1965)
恭愍王(金哲埈,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5)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閔賢九, 歷史學報 38‧40, 1968)

[집필자]

민현구(閔賢九)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