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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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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정몽란(鄭夢蘭)
일명(一名)정몽룡(鄭夢龍)
자(字)달가(達可)
호(號)포은(圃隱)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337(충숙왕 후6)
졸년1392(공양왕 4)
시대고려후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운관(鄭云瓘)
이씨(李氏)
출생지경상도 영천
저서『포은집』
공신호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
공신호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
공신호안사공신(安社功臣)

[상세내용]

정몽주(鄭夢周)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1. 가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하였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된 뒤에 다시 몽주라 고쳤다.
2. 관직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검열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모해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듬해 낭장 겸 합문지후(郞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하여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그는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하여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하더니,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사서통(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고,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파선을 당하여 일행12인이 익사하고,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요(侵擾)가 심하여 나흥유(羅興儒)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하게 하였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구수(拘囚)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전일의 일로 앙심을 품은 권신들이 정몽주를 천거하여 구주(九州) 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를 개진하여 사명을 다하고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판서를 역임하고, 1380년 조전원수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녹훈되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봉사하였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하여 요동(遼東)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당시 명나라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사명을 다하여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하여 결국 그 뜻을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하여,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觀事)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 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3. 인품과 치적
고려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오른 그는 아무리 큰 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하였는데, 그는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하여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하여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경력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기강을 정비하여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도태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며,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4. 신진세력에 희생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기회를 보아 이들을 제거하려 하던 중,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을 고하여 그날밤으로 병을 무릅쓰고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5. 평가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하여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그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을 추증하였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에 의하여 문묘에 배향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太宗實錄
圃隱集
治平要覽
鄭夢周(金庠基, 朝鮮名人傳, 文豪社, 1965)
鄭夢周(河炫綱,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9)

[집필자]

박천규(朴千圭)

명 : "몽주(夢周)"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1可圖也乃劾三司左司趙浚政堂文學鄭道傳密直副使南誾禮曹判書尹紹宗判典校寺事南在淸州牧使趙璞王下其書都堂夢周從中扇之將浚等六人竝流遠地分遣其黨巡軍千戶金龜聯刑曹正郞李蟠等就貶所鞫問將殺之時太宗廬于齊陵神懿王后
國朝編年v05祖宗之過而沮之是大不然殿下斷然復之則將與世宗比德而無忝於文宗矣何者太祖盡誅王氏太宗先誅鄭夢周以私觀之夢周謀害祖宗乃子孫之大憝而世宗錄用其後以奬其節而又列於古今忠臣之後文宗特求王氏後立崇義殿以繼絶祀兩宗之仁
國朝編年v07少慨然有求道之志受業於金宏弼學於金宗直之學傳於其父司藝臣淑滋淑滋之學傳於高麗臣吉再之學得於鄭夢周之門夢周之學矣實爲吾東之祖則其學問淵源類此其平居待人以和接物以誠事父母盡其孝處兄弟極其友硏窮益精踐履益篤大本
紀年便攷v4之祥追捕之并梟首于尙州觀者英不嗟悼門生翰林鄭夢周請王收其屍為文而祭之聞者義之初知貢舉時擢鄭夢周為壯元夢周輓得培曰君是儒生合討文奈何提劒仗三軍忠魂壯魄今安在囬首青山空白雲官至政堂文學謚文忠弟得齊商山君先致討
紀年便攷v5極陳古今矢隣利害主將敬服求詩者坌集援茟立就緬徒日擔肩輿請觀奇勝刷還我國人幾百人且禁三島侵掠其後倭人聞夢周卒莫不嗟惋至有齊僧蔿福者
紀年便攷v5皆危之夢周畧無難色及至極陳古今矢隣利害主將敬服求詩者坌集援茟立就緬徒日擔肩輿請觀奇勝刷還我國人幾百人且禁三島侵
紀年便攷v5節且請益承襲也時本國與朝廷多釁帝將加兵於我以五歲貢不如約杖流使臣䓁至是人皆憚行陳平仲賂林堅味免堅味舉夢周禑面諭夢周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凂朝天乎我國去南京八千里實九十日䄇而去聖節纔亦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
紀年便攷v5襲也時本國與朝廷多釁帝將加兵於我以五歲貢不如約杖流使臣䓁至是人皆憚行陳平仲賂林堅味免堅味舉夢周禑面諭夢周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凂朝天乎我國去南京八千里實九十日䄇而去聖節纔亦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十此臣恨也
紀年便攷v5夢周晨夜倍道及節日進表帝覧表曰爾國陪臣必相託不肯來故迫遣爾也爾淂非徃日以賀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
紀年便攷v5夢周晨夜倍道及節日進表帝覧表曰爾國陪臣必相託不肯來故迫遣爾也爾淂非徃日以賀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
紀年便攷v5丑生字達可號圃隱母李氏有娠夢抱蘭盆驚墜寤而生名夢蘭肩上有黒子七如斗形九歲母夢黒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夢周也又名夢龍旣冠改今名爲人豪邁絶倫有忠孝大節天分甚高好學不倦私淑於李齊賢倡明絶學時經書至東方者惟朱子集
紀年便攷v5以興儒術立義倉賑窮乏設水站便漕運辛禑時與大明多釁帝流使臣金庾洪尙載等人皆憚之行賂權貴䂓避最後林堅味薦夢周禑召見靣諭之夢周曰君父之命雖水火不避况朝天乎但我國去南京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距聖節纔六旬此臣
紀年便攷v5名夢龍旣冠改今名爲人豪邁絶倫有忠孝大節天分甚高好學不倦私淑於李齊賢倡明絶學時經書至東方者惟朱子集註耳夢周講說發越超出人意聞之者頗疑焉及其得胡炳文四書通無不脗合諸儒尢加歎服李穡亟稱之曰夢周論理橫說竪說無非當
紀年便攷v5日就道倍行及聖節進表帝覧表書日曰爾國陪臣必相托錄事姓名金處祚善故曰迫乃遣爾也爾得非徃者以賀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之狀帝特賜慰撫優禮以送遂放還庾尙載等有僧賜詩曰江南萬里野花發何䖏春風無好山夢周執詩流涕曰
紀年便攷v5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之狀帝特賜慰撫優禮以送遂放還庾尙載等有僧賜詩曰江南萬里野花發何䖏春風無好山夢周執詩流涕曰鳴呼晩矣洪武壬申被害於趙英珪高吕等年五十六有櫜鞬武夫衝其前導而過夢周顧其隨行錄事曰汝可落後
紀年便攷v5姬子高麗忠肅王丙子生初名哲字遂初九歲從父受史記至伊尹放太甲問曰臣可以放祖朝以崧陽書院位牌事上禀 上曰夢周高麗人也豈肯受本朝官爵雖有領相之贈只書圃隱先生可也孫保見下
紀年便攷v5里野花發何䖏春風無好山夢周執詩流涕曰鳴呼晩矣洪武壬申被害於趙英珪高吕等年五十六有櫜鞬武夫衝其前導而過夢周顧其隨行錄事曰汝可落後答曰小的從大相何可他徃乎再三呵止亦不從行至善竹橋抱持同死姓名不傳可惜太宗即位初
紀年便攷v5窮乏設水站便漕運辛禑時與大明多釁帝流使臣金庾洪尙載等人皆憚之行賂權貴䂓避最後林堅味薦夢周禑召見靣諭之夢周曰君父之命雖水火不避况朝天乎但我國去南京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距聖節纔六旬此臣恨也即日就道倍行
紀年便攷v5子恭愍王壬寅以進士登科官止掌令恭讓王壬申以掌令與諌官金震陽李擴等請罪趙浚鄭道傳南誾泊鄭夢周殉國坐震陽夢周之黨放流之是年麗亡遯居衿川坐不北向終身不對 漢陽太宗壬辰因其詩大臣臺諌請鞫其詩曰千載神都隔杳茫一云漢
紀年便攷v5道義交追麗運將訖率門生朝士七十二人遯居于萬壽山杜門洞改今名以明杜門於萬壽之義有言志錄以自靖時送薇菜於夢周以示西山之志且有詩曰隔水柳眠元亮夢登山薇吐伯夷心此可以見其志也 太宗屡徵以左議政不起竟卒於杜門洞或云
紀年便攷v5心恊議立學校禁族婚革夷風遵華制麗末巨室之貪縱林堅味廉興邦李仁任最其尢者也不協於三人又被鄭道傳誣以朋比夢周被劾並諸子削職遠流仕麗朝歴提學賛成事門下右侍中錄㓛封丹陽府院君恭讓王庚午判三司事復封丹山府院君我太宗
紀年便攷v5以進士登文科與鄭夢周同榜以清直著夢周詡其高節不可折官止密直司事錄㓛封上黨君見我太祖威德日盛退歸郷里及夢周遇害與同志入杜門洞同隱太祖太宗以賛成屡徵不起乙酉卒謚文良子恂厯少卿継親志守罔僕
紀年便攷v5郭樞清州人判府事琛子忠肅王戊寅生恭愍王庚子以進士登文科與鄭夢周同榜以清直著夢周詡其高節不可折官止密直司事錄㓛封上黨君見我太祖威德日盛退歸郷里及夢周遇害與同志入杜門洞同隱太祖太宗以
紀年便攷v5文科恭讓王己巳同鄭夢周偰長壽成石璘以䇿立王錄一等勳進三重大匡封玉川府院君時我太祖威德日盛即杜門自靖寄夢周詩曰屬耳不敢聞世事湍川明月一䉴衣庚午卒謚忠獻子瑜見下子瑛官止副正太宗徵以吏判世子師傅不就
紀年便攷v5武官止判義州牧與彭年爲八寸元弟五世孫良佐見下夢周文章發越以忠義爲已任當王氏墜服之際以謀告夢周請預備及夢周之死仲良亦被竄逐之禍其危忠卓節師弟同歸弟季良見下
紀年便攷v5祖兄元桂婿號春堂文科官止左承㫖受學於鄭白守選清白吏才兼文武官止判義州牧與彭年爲八寸元弟五世孫良佐見下夢周文章發越以忠義爲已任當王氏墜服之際以謀告夢周請預備及夢周之死仲良亦被竄逐之禍其危忠卓節師弟同歸弟季良
紀年便攷v5清白吏才兼文武官止判義州牧與彭年爲八寸元弟五世孫良佐見下夢周文章發越以忠義爲已任當王氏墜服之際以謀告夢周請預備及夢周之死仲良亦被竄逐之禍其危忠卓節師弟同歸弟季良見下
紀年便攷v6馳及撃馬首夢周墜而走呂䓁斬之太宗入告太祖太祖大驚怒曰吾家素以忠孝聞汝䓁擅殺大臣國人以我為不知乎太宗曰夢周䓁將淊我家豈坐而待亡乎太祖怒方盛神德王后厲色告曰公常以大將軍自䖏乃何以驚惧至是
紀年便攷v6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趙英茂高呂李敷䓁要於路英珪馳撃不中夢周顧叱
紀年便攷v6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夢周乘太祖病篤嗾臺諌劾趙浚鄭道傳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太祖太宗謀去夢周 太祖兄元桂婿卞仲良洩其謀於
紀年便攷v6夢周使坮諌先劾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䓁流遠州將及上時靖安君廬于齊陵聞變馳還用鄭擢計欲使佟豆蘭殺夢周豆蘭曰我公不知之事
紀年便攷v6之以及太祖太宗謀去夢周 太祖兄元桂婿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趙英茂高呂李敷䓁要於路英珪馳撃不中夢周顧叱
紀年便攷v6祖病篤嗾臺諌劾趙浚鄭道傳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太祖太宗謀去夢周 太祖兄元桂婿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趙英茂高呂李敷䓁要於路英珪馳撃不中夢周顧叱
紀年便攷v6余何敢為乃令趙英珪䓁殺夢周於善竹橋鞫流臺諌禹玄宝䓁○聖祖受命天與人歸改宝之日市不易肆朝不換班漢都冠盖俱是松京舊臣自我朝言之則豈
紀年便攷v6策馬而走英珪馳及撃馬首夢周墜而走呂䓁斬之太宗入告太祖太祖大驚怒曰吾家素以忠孝聞汝䓁擅殺大臣國人以我為不知乎太宗曰夢周䓁將淊我家
紀年便攷v6乘太祖病篤嗾臺諌劾趙浚鄭道傳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太祖太宗謀去夢周 太祖兄元桂婿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趙英茂高呂李敷䓁要於路英珪馳撃不中夢周
紀年便攷v6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夢周乘太祖病篤嗾臺諌劾趙浚鄭道傳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太祖太宗謀去夢周 太祖兄元桂婿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趙英茂
紀年便攷v6賛威化回軍之策靖安君太宗用鄭擢計欲使之蘭殺鄭夢周之蘭曰我公不知之事余何敢為靖安乃令趙英珪趙英武等撃殺夢周於善竹橋 上與之䔵遊街上見一婦戴水盆過 上以彈丸穿穴水未及出之蘭随發泥丸塡塞觀者奇之策開國㓛一等封青
紀年便攷v6因權近䟽贈夢周領相謚文忠若恒賛成事
紀年便攷v7生以白衣慷慨詣軍門上書極言大小順逆之義太祖旋師開國後授順天府使盖以前日之言順乎天理也與鄭苯成三問交善夢周忌日齋沐為位哭終身不廢世宗以司諌徵端宗以承旨徵皆不起丁丑端宗昇遐入山痛哭北向四拜遂仰藥而絶年八十六
紀年便攷v7鄭保夢周孫吏議宗誠子號雪谷早中司馬官止監察與六臣友善放浪山水間及六臣獄起保慨然不食其妹為韓明澮之妾一日醉徃見
紀年便攷v8保見韓明酉澮曰六臣何罪公若殺之當為萬古罪人上親鞫供曰常以成朴為正人君子故有是言上命轘之以忠臣夢周之孫時减死○以雲釰勿入侍與成朴之不用俞計以俟他日成事莫非天也
紀年便攷v26鄭維城夢周九世孫博士謹子黄致敬外孫宣祖丙申生字徳基號陶村仁祖丁卯登江都庭試歴翰林銓郞吏判㮴島劉興 治将投虜殺總
紀年便攷v29鄭纉祖夢周十一世孫龜徵子孝宗己亥生字孝伯號睡隠弱冠學於尹拯始滋惑於宋時烈及熟講時烈文字實知為正大君子備陳於拯冀
東國歷代總目v01夢周字達可號圃隱少好學至老不倦爲東方理學中之祖嘗倣朱子家禮令士庶立廟奉祀又內建五部學堂外設鄕敎爲興化立敎
國朝人物志v1悔令攸司鞫問其罪明正典□震陽等牒憲府發吏卒守浚誾家侍中鄭夢周依其議流浚等于遠地夢周伏節皆召還誾密與吏曹判書趙仁沃及道傳浚璞等五十二人協謀推戴我太祖入本朝策開
國朝人物志v1不可不辨將造朝而病不能起遣和及李濟等啓曰省憲論浚請與臺諫卞明往復再三恭讓王不聽夢周欲觀變托以問病而來太祖待之如初和白太宗曰殺夢周此其時也入本朝錄開國功臣一等
國朝人物志v1受性理之學禑初登文科累官至政堂文學兼大司憲與鄭夢周等建議革胡服襲華制未幾夢周獄起杖流諫官金震陽等淮伯以疾辭職右常侍金子粹上疏論淮伯與震陽同科請抵罪削
國朝人物志v1秀朗以名節自勵崔瑩犯遼佑生年十七上書太祖明其不可後從鄭夢周學通九經四書夢周歿每當忌日必爲泣哭太祖朝除順天府使太宗朝仲兄德生以非罪死棄官歸羅州鄭苯
國朝人物志v1爲心而不能量人度力深取觸忤受禍尤慘其視疏廣二子知幾遠引終脫危機相去遠矣摭言妻鄭氏圃隱夢周曾孫女之瑞自度不免擧酒與訣曰此行必不得返奈祖先神主何鄭泣曰當以死自保之瑞死籍產妻父允寬曰家
國朝人物志v2字汝頊延日人參奉龜應子文忠公夢周後甲午文科博士戊戌卒年三十一以男維城貴贈領議政曾孫齊斗作墓表人物考
國朝人物志v3字德基號陶村延日人文忠公夢周九代孫仁祖丁卯文科歷說書檢閱顯宗庚子拜右議政孫齊賢尙淑徽公主封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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