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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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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이지공(李之公)
자(字)중사(仲思)
호(號)익재(益齋)
호(號)역옹(櫟翁)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287(충렬왕 13)
졸년1367(공민왕 16)
시대고려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학자 > 유학자
이진(李瑱)
처부권부(權溥)
저서『익재난고(益齋亂藁)』
저서『역옹패설』
공신호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

[상세내용]

이제현(李齊賢)
1287년(충렬왕 13)∼1367년(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1. 가계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이진(李瑱)이 신흥관료로서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그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이진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하여,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1301년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부(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2. 관직
1303년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출신 일류 문인들과 잦은 접촉을 가지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하여 특기할 것은 세번에 걸쳐 중국대륙 깊숙이까지 먼 여행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하여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하여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하여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하여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먼 여행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이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원과의 관계
1320년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하면서,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고,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같은해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고,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瀋王) 고(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이제현은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하여지고 있다. 그는 이어서 멀리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뒤 충숙왕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1339년 조적(曹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여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하였는데, 그동안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4. 공민왕의 보좌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하여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뒷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서는 자문에 응하였으며,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이제현은 당시 고려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5. 학문과 저술
학자로서의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부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하여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구강서원(龜岡書院)금천(金川)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益齋의 在元生涯에 대하여(金庠基, 大東文化硏究 1, 1964)
李齊賢(高柄翊, 人物韓國史 Ⅱ, 1965)
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대하여(金哲埈, 東方學志 8, 1967)
整治都監의 設置經緯(閔賢九, 國民大學論文集 11, 1977)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閔賢九, 震檀學報 51, 1981)
李齊賢의 歷史意識(鄭求福, 震檀學報 51, 1981)
益齋小樂府와 高麗歌謠(徐首生, 東洋文化硏究 11, 1984)

[이미지]

[집필자]

민현구(閔賢九)

성명 : "이제현(李齊賢)"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3一年辛卯立甲寅爲洪倫等所弑在位二十三年壽四十五葬玄陵○妃魯國公主元宗室衛王女○配享政丞王煦鷄林府院君李齊賢益城府院君李公遂夏城府院君曺益淸瑞城君柳淑○壬辰王解辮髮○同年趙日新謀叛伏誅○同年罷政房○丙申奇轍等
國朝彙鑑v1上下服色以齊國俗也禁女服長衣以別男女之制也我東前代君臣合祭於東郊也前朝陵墓量置守護蠲徭禁樵也雙冀崔沖李齊賢鄭夢周權近等配享聖廟也倣唐制立武成王廟也前朝文益漸始得綿種崔茂宣始學火砲竝立祠鄕貫錄其後也文科經書外
紀年便攷v4白頤正文節子號彛齋安裕門人天資純厚有公輔器時程朱之學始行中國未及於東方頤正在元多求性理書以歸誨人不倦李齊賢朴忠佐首先師受而權溥又鏤板四書集註以廣其傳東方學者知尊程朱頤正之力也李穀白文寶李仁復皆門人也忠肅甲寅
紀年便攷v4朴孝修竹山人號石齋忠肅朝登科三兄弟同榜以清白名於世與李齊賢共知貢舉國俗掌試者謂之學士忠肅嘉孝修清白賜銀瓶五十米百石令辦學士宴以寵之官至大言封延昌君忠肅丁丑卒
紀年便攷v4時伯顏官太保曾不禮於前王待之甚薄蓄其宿憾使王與頔黨辨李兆年慷慨謂李齊賢曰吾欲面訴丞相其意可回列㦸守門莫呌其閽幸其出田城南吾當上書道左碎首馬蹄之下死明吾君子其把筆書吾書將行
紀年便攷v4恤百姓 王至自元翌日元使桑哥頒詔王宴桑哥用女樂百官侍座皆花名曰君臣度會宴○賜宦者高龍普㓛臣號○金海君李齊賢上書都堂非古制一切釐革之意也○判典校寺事李穀在元致書宰相陳社稷安危人民利病君子進退之道○元使李庥秦瑾
紀年便攷v4忠宣王命閔漬修編年綱目尙多闕漏乃命府院君李齊賢賛成事安頔韓山君李穀安山君安震提學李仁復撰進
紀年便攷v4府院君○京城大飢疫○王不豫放囚庶務决於德寧公主○王薨于金永旽一暾第遣護軍申元甫如元告哀○政丞王煦等遣李齊賢如元上表來曰國王乃於近日得疾而薨舉國哀慟王年㓜無後而本國隣於曰本不庭之邦不可一日無主今有王祺普塔失里
紀年便攷v4字耆卿號菊齋安裕門人十五進士十九登科性忠孝惠族親睦僚友嗜讀書老不懈甞與子凖裒集歴代孝子凡六十四人使婿李齊賢著賛名曰孝行錄行于世請刊朱子四書集註以廣性理之學東方性理之學由溥而昌然為人無圭角久典銓衡鬻官營產時人
紀年便攷v4也掌銓十三年䖏台司二十二年無一補外邑無一遭彈章官至都僉議修文大提學封永嘉府院君子凖臯煦謙僧宗頂及女婿李齊賢宗室璹珣皆封君世號一家九封君忠穆丙戌卒年八十五謚文正子凖皐煦見下
紀年便攷v4監察持平應教皆不就自㓜嗜學性温厚儉約雖為卿相居家衣服如布衣時尤好讀昜老而不輟東方性理之學始於白頤正而李齊賢朴忠佐継其後官至賛成事以㓛封咸陽府院君忠定己丑卒年六十三謚文齊八世孫民獻見下
紀年便攷v4河中本以賤孽忠肅朝與官奴姜融風水僧曺莘卿同時拜相忠惠朝以有㓛於曺頔之亂賜㓛臣號王置書筵以河中及韓宗愈李齊賢朴忠佐金倫李蒨盧英瑞䓁輪日侍讀㳟愍朝元徵兵助南征丞相脫脫将授命適河中奉使在元脫脫言於河中宜遣勇銳以助
紀年便攷v4陽則三十六國来朝王惑其說有是命致仕尹澤上言妙清惑仁廟幾至覄國厥鑑不遠興工劳衆恐傷本根○李齊賢致仕○命李齊賢定宗廟昭穆之次○命文武百官黑衣青笠僧服黑巾大冠女服黑羅又於諸山栽松茂密凢器用鍮銅瓦器以順風土従司天少
紀年便攷v4以䜟說王曰都漢陽則三十六國来朝王惑其說有是命致仕尹澤上言妙清惑仁廟幾至覄國厥鑑不遠興工劳衆恐傷本根○李齊賢致仕○命李齊賢定宗廟昭穆之次○命文武百官黑衣青笠僧服黑巾大冠女服黑羅又於諸山栽松茂密凢器用鍮銅瓦器以
紀年便攷v4十七年七月我定宗大王大祖第二子誕降○王邀普愚于內殿賜黃金五十両金線一匹○王如奉恩寺○命修中外學校○命李齊賢相宅于漢陽築宫闕普愚以䜟說王曰都漢陽則三十六國来朝王惑其說有是命致仕尹澤上言妙清惑仁廟幾至覄國厥鑑不
紀年便攷v4己亥八年至正十九年江浙張士誠丁文彬遣使獻方物一年再納○納李齊賢女封為惠妃○方國珍遣使獻方物○東北靣兵馬使鄭暉獻海青王曰今軍務方興宜崇儉約安用珍禽放之○紅頭賊三千餘
紀年便攷v4辛丑十年至正二十一年王至自白岳○命李齊賢講無逸篇○張士誠遣人来獻綵改玉斝沉香弓矢○淮南省右丞王晟遣使来獻綵帛沉香○遼東省捴管高家奴遣使来獻玉
紀年便攷v4黃石奇昌原義昌縣人輔子陪魯國公主東来遂籍昌原有風流文雅以知密直司事同韓宗愈李齊賢朴忠佐䓁更日侍讀盖極一時之選也以都僉議參理封檜山君辛丑紅賊之變従王于福州王待之有加官至三重大匡府院君
紀年便攷v4生字喬年號挴溪風儀俊秀進退有度有宰相器忠烈朝登科參銓注八年慎重名器少不私王敬重見壽松至必起侍之忠惠時李齊賢䓁薦松壽請備筵官以資啓沃由是名重於時官至政堂文學䝺化㓛臣㳟愍丙午見辛旽益用事知國将亡憂憤成疾而卒國人
紀年便攷v4長髮為頭陁名辛旽始入內用事稱為師傅咨訪國政言無不従士大夫之妻妾以為神僧聼法求福而至旽輒私焉李仁復韓修李齊賢并請勿近王不聼王思得雔世獨立之人以革其因循之弊及見旽以為得道寡慾授以國政而不疑旽旣得志恣行威福主於金
紀年便攷v4李齊賢瑱子權漙婿字仲思號益齊又檪齊初名之公白頤正門人自㓜嶷然已有作者氣十五登科奉使西蜀封金海君文章德望名盖
紀年便攷v4德寧公主方盛年居中允忠與裴佺出入禁內得幸於公主秉政弄權作威作福國人㘦齒久矣大行王謚號久未奏請於是金倫李齊賢朴忠佐䓁上書陳允忠之罪王及公主感悟始有請謚之議使元惡大懟偃息優容幾十年官至賛成事㳟愍己亥以㣲罪殺之
紀年便攷v4趙日新弄權專恣橫暴朝廷自王以下不能堪日新忌李齊賢䓁居已之右惡諸部及王左右親幸遂謀作亂圍王宫殺宿衛臣僚脅王開御寳自除為右政丞賜㓛臣號賞燕邸随従之㓛以其
紀年便攷v5 桓祖恠問之對曰此子誠異人非公所及公家業此子必能大之因以子孫屬之後達衷子犯罪死太祖特原之所著詩文大爲李齊賢所稱賞官至祭酒封鷄林君辛禑甲子卒謚文靖
紀年便攷v5九歲母夢黒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夢周也又名夢龍旣冠改今名爲人豪邁絶倫有忠孝大節天分甚高好學不倦私淑於李齊賢倡明絶學時經書至東方者惟朱子集註耳夢周講說發越超出人意聞之者頗疑焉及其得胡炳文四書通無不脗合諸儒尢加
紀年便攷v9道量田○頒大典續錄○以唐紗帽賜承旨曺偉教曰衣冠當從華制故以此賜之欲使人觀法而製之○命修箕子廟麗太祖陵李齊賢墓従侍讀官俞好仁言也齊賢墓在牛峯縣○改軍籍○宣醞子判府事孫舜孝第兼賜御札
東國歷代總目v01甲寅元年元仁宗延祐元年上王忠宣如元○上王旣至元命留京師上王構萬卷堂于燕邸召李齊賢置府中迎置元學士姚燧閻復趙孟頫虞集等與之遊考究書史以自娛
大東遺事v1陵大君燾是爲忠肅忠宣自稱瀋陽王以居燕京兄子暠爲瀋陽王世子忠宣樂居燕京不欲還國遂開萬卷堂于燕邸以李齊賢趙孟頫姚燧閻復李齊賢趙孟頫姚燧閻復等與之遊考究經史以自娛忠宣嘗問李齊賢曰古稱我國文物侔於中華今學
大東遺事v1國公主以故有力於元而有命忠定廢遜于江華明益齊征東省事年遇酖薨葬聰陵○時江陵尙在元國內無君大君遙命李齊賢權斷征東省事齊賢措置得宜國以賴安是年大君及公主至自元卽位是爲恭愍王
大東遺事v1鄭世雲嘗指爲妖僧而欲殺之王知之密令避之李承度見之曰亂國家者必此髡也未幾王封旽爲眞平侯賜功臣號李齊賢嘗言於王曰旽之骨相類古之凶人請勿近之王不聽吳仁澤又云道詵祕記有非僧非俗亂政亡國之語必此人也宜早除
歷代帝王紀年v01益齋李齊賢字仲思年十五中丙科曰比小技耳不足以大蓄吾德討論墳典淹貫精姸忠宣王時被讒出西藩公往渴之忠墳蕩然封難林府
國朝捷錄v01松善山水李楨崇孝子自五嵗善畵公榦懶翁善山水宣廟時人世業畵工李澄鳳林庶子子涵虛舟各體魚夢龍文科縣監善梅李齊賢栗村善蒲萄金埴仲厚退村善牛李上佐自實各體士人之奴中廟特命贖之石敬善竹尹仁傑各體石陽正灘隱名霆臨瀛瀛大
國朝捷錄v01恭愍王室僉議贊成事瑞寧君文僖公柳淑善詩死於逆盹之手號思庵元授栦斷征東省事文忠公李齊賢善詩左政丞夏城府院君襄平公曺益淸贊化功臣領都僉議益山府院君文憲公李公遂李公下第詩白日明金殿靑雲起草廬
鶴塘銓攷v1金浦郡守○柳泓尹尙衡李齊賢
靑邱風雲v1洪儒裵玄慶卜智謙爲開國功臣崔致遠羅末獻康王時以文章入唐爲學士郭輿以隱服烏巾鶴氅侍左右人謂金門羽客李齊賢忠肅王質於元齊賢與元儒趙孟頫虞集等論文自娛李穀號稼亭爲元科第二爲翰林學士李穡號牧隱稼亭之子及第翰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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