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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李仁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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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이득옥(李得玉)
자(字)미수(眉叟)
생년1152(의종 6)
졸년1220(고종 7)
시대고려중기
본관인천(仁川)
활동분야문학 > 문인
증조부이오(李䫨)
저서『은대집(銀臺集)』
저서『쌍명재집』
저서『파한집』

[상세내용]

이인로(李仁老)
1152년(의종 6)∼1220년(고종 7). 고려 무신집정기 때의 문인. 본관은 인천(仁川).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가문은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 3대가문의 하나였던 경원이씨로,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으로서 부동의 문벌을 형성해왔다.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는데,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寥一)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1170년(의종 24)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뒤에 환속하여 25세 때에는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고,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고,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뒤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으므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때부터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이세황(李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으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그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한 것은,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를 위해서는 신의(新意)를 중시하였다.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쌍명재집』『파한집』 등이 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破閑集
東國李相國集
補閑集
高麗竹林高會硏究(李東歡, 高麗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68)
高麗朝漢文學硏究(徐首生, 螢雪出版社, 1971)
李仁老의 現實觀과 文學思想(金鎭英, 冠嶽語文硏究 4, 서울大學校, 國語國文學科, 1979)

[집필자]

김진영(金鎭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