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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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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918(신라: 경명왕 2/발해: 대인선 13/후백제: 견훤 27/태봉: 궁예 정개 5/태조 천수 1)
시대후고려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궁예(弓裔)에 대하여
미상∼918년. 후고구려의 건국자‧왕. 재위 901∼918년. 성은 김씨.
1. 탄생설화
부친은 신라 제47대 헌안왕이고, 모친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이다.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하기도 한다.

그의 탄생설화에 의하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그는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신라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뒤 궁예는 유모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2. 후고구려의 성립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유망하여 초적(草賊)으로 변하였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기훤이 잘 대우해주지 않자,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뒤 궁예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 지금의 醴泉)내성(奈城: 지금의 寧越)울오(鬱烏: 지금의 平昌)어진(御珍: 지금의 蔚珍)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 지금의 麟蹄)생주(狌州: 지금의 華川)부약(夫若: 지금의 金化)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패서지역(浿西地域)의 무리들이 항복하여왔다. 이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임진강연안을 공략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王建)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 지금의 長湍 북쪽, 兎山 남쪽)임강(臨江: 지금의 長湍)인물(仁物: 지금의 開豊郡 豊德) 등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孔巖: 지금의 楊平)금포(黔浦: 지금의 金浦)혈구(穴口: 지금의 江華) 등을 복속하였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國原: 지금의 忠州) 등 30여성을 취한 양길궁예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899년(효공왕 3)에는 송악군을 수리(修理)하고 왕건을 보내어 양주견주(見州)를 복속하고, 그 다음해에도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지금의 華城郡 南陽)청주(靑州)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阿飡)의 벼슬을 주었다.

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그해 7월 청주인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尙州) 등 30여현을 얻으니, 공주장군 홍기(弘寄)가 투항하여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聖册)’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鎭)을 평정하였으며, 평양성주 금용(黔用)이 투항하여왔다.
3. 신라병합실패
그뒤 궁예는 세력이 강성하여짐을 믿고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였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해에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로 금성(錦城)을 점령하도록 하고, 이를 나주라 이름하였다.

왕건이 거느린 해상세력에 의하여 나주정벌이 이루어져 궁예가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견훤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라 고쳤다. 왕건을 추대한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축출되어,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斧壤: 지금의 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당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後三國時代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李相佰博士回甲記念論叢, 1964;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弓裔姓名考―高句麗繼承標榜과 關聯하여―(朴漢卨, 李瑄根博士古稀記念韓國學論叢, 1974)
弓裔政權의 成立과 變遷(李貞信, 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1984)
弓裔政權의 中央政治組織(趙仁成, 白山學報 33, 1986)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