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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憲康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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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一名)김정(金晸)
생년?(미상)
졸년886(정강왕 1)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金氏)
조부김계명(金啓明)
조모광화부인(光和夫人)
의명부인(懿明夫人)

[상세내용]

헌강왕(憲康王)
미상∼886년(정강왕 1). 신라 제49대왕. 재위 875∼886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晸).

부친은 경문왕이고, 모친은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의 큰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김계명(金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며,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晃: 뒤의 정강왕)만(曼: 뒤의 진성여왕)윤(胤)이 있었다.

서자로 요(嶢)가 있어 뒤에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하여졌다. 즉위한 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876년(헌강왕 2)과 886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望海寺)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博士)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三郞寺)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詩)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信弘)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신(北岳神)과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地理多都波)”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동해안의 개운포(開雲浦)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處容)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處容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처용을 지방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其人制度)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狄國)인 보로국(寶露國: 지금의 안변군 서곡면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중국 당나라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朝鮮金石總覽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