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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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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46
졸년2009
시대대한민국
본관광주(光州)
활동분야정치 > 대통령
노판석(盧判石)

[상세내용]

노무현(盧武鉉)
1946년 8월 6일~2009년 5월 23일. 현대 정치인.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진영읍(進永邑)이다.

증조부는 노응규(盧應奎)이고, 조부는 노학용(盧鶴容)이다. 부친 노판석(盧判石)과 모친 이순례(李順禮)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인은 권양숙(權良淑)이다.

노무현은 진영중학교를 다닐 때 가난 때문에 1년 휴학을 하기도 했으나 졸업 한 후 당시로서는 명문이었던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입학했다. 196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업했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2사단(을지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1973년 초등학교 동창인 권양숙과 결혼했다.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유신 시절에 막노동과 사법시험 공부를 병행하여 네 번째 도전을 한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고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1978년 5월 7개월 만에 사임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으며 높은 수임료를 받아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부산출신 김광일 변호사의 권유로 1981년 부산지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다.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았으며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여는 시민‧노동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민주항쟁’에 참여했다. 1987년 8월 22일의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사인 규명을 이상수 변호사 등과 함께 요구했다. 결국 그해 9월에 장식(葬式) 방해와 노동법 상 ‘제삼자 개입’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으며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재야에서 인권 옹호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노무현은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부산 동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988년 11월 제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전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의 증인들을 상대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의원은 죄가 없다는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파격적 행동을 해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90년 1월 12일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서 정국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던 노태우 대통령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정당인 민주정의당 총재의 자격으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함께 3당합당 선언을 했다. 이에 이기택(李基澤)과 노무현, 김정길(金正吉) 등 구(舊) 통일민주당 잔류파 5인 의원과 무소속 의원 박찬종(朴燦鐘), 이철(李哲) 등이 3당합당을 “지역주의를 볼모로 하는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난하며 합류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정당 건설에 나서 1990년 6월 15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규모가 매우 작아 보통 ‘꼬마 민주당’으로 불렸다. 당시 노무현은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김영삼과 결별했다.

1991년 6월 시‧도 지방의회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하자 야권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해 9월 김대중(金大中)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 민주당은 의원 수가 늘어났다. 이로써 민주당은 김대중과 이기택의 공동대표체제가 구축되었으며 한국 정통 보수야당의 계보를 이어가게 됐다.

노무현은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한편 1992년 12월 18일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김영삼과의 경쟁에서 밀려 낙선하자 정계 은퇴와 정계 복귀 등을 놓고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이기택 대표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노무현은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에 출마했으나 서울과 호남은 민주당, 영남은 민주자유당이 충청은 자유민주연합이 3분하는 지역구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 그 이후 김대중계 의원들이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함으로써 민주당은 다시 분당되었다.

이때 노무현, 이기택, 김원기, 이부영, 제정구, 김정길 등은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반대하며 민주당에 잔류하면서 새로운 정당 창당 운동을 추진했는데 결국 진보신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이라고 개칭했다. 1996년 4월 11일 노무현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은 자당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면서 분열했다. 이부영‧이철 등은 신한국당으로 갔으며 노무현‧김원기‧김정길 등은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통합민주당은 소멸했다. 노무현은 국민회의의 부총재로서 대통령선거 찬조 연설과 파랑새유세단 단장으로서의 지원 활동 등으로 인해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을 도운 셈이 되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자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에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종로구를 포기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 북‧강서 을 지역구의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 당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를 ‘바보 노무현’ 또는 ‘노짱’이라 부르며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약칭 노사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국회의원 낙선 후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당정치사상 처음 도입된 국민경선제에서 이른바 ‘노풍(盧風)’을 일으키며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국민승리21의 정몽준 후보와의 야권후보단일화 경쟁에서도 승리했다.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정몽준 의원은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흔들리기도 했으나 오히려 지지자의 결집과 동정표를 불러일으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에 57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검토했고, 행정수도 이전을 계획했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따라 행정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선회해야 했다. 이외에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일로 논란이 되기도 했으므로 그 평가가 엇갈린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대한민국 헌법 위반으로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이후 제16대 국회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정당들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의 호된 심판에 직면해야 했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2006년 말 노무현 정권 지지율은 5.7%로 역대 대통령 중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정권말기에는 지지율 53.7%로 상승하기도 했다. 이는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한 반짝 효과이기도 했는데 2007년 10월 4일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햇볕정책이라고 표현되는 김대중 정부의 남북 화해 정책을 계속 이어 나갔다고 평가된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언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인권 신장에 기여하였다는 평가가 있고, 탈(脫)권위를 실천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친환경 농업과 농촌 환경 개선 등에 힘썼으며 봉하마을은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낙향하면서 가지고 간 대통령 재임 시의 기록물 복사본에 대해 국가기록물 무단 유출이라는 혐의를 받게 되어 결국 이명박 대통령에게 반납해야 했다.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형 노건평(盧建平)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며 노무현도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

장례는 국민장 7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사망 후 일주일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500만이 넘는 인파가 각지의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영결식은 서울 경복궁에서 진행되었고, 시민들이 준비한 노제가 서울광장에서 열려 추모 인파가 서울특별시청부터 서울역까지 몰렸다. 유해는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한 후에 김해 봉하마을에 안치되었다.

저서로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으며 사후(死後) 출간된 저서로는 『성공과 좌절』(2009)‧『진보의 미래』(2009)‧『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유시민 엮음, 2010)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최고훈장 바스 대십자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GCB),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자녀로는 1남[노건호(盧建昊)]와 1녀[노정연(盧靜姸)]를 두었다.

[참고문헌]

노무현‧김상철‧김경수‧김종민‧백승권 (외),『봉하일기: 그 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2012)
조선일보(2009.05.23)
동아일보(2009.05.23)
한겨레(2009.05.23)

[집필자]

이완범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