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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李泳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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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29
졸년2010
시대대한민국
본관평창(平昌)
활동분야언론인/사상가
이근국(李根國)

[상세내용]

리영희(李泳禧)
1929년∼2010년 12월 5일. 현대 언론인‧사상가.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출생지는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북진면이다.

부친은 이근국(李根國)이고, 모친은 최희저(崔晞姐)다.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1950년에 한국해양대학 졸업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연락장교로 자원입대하여 1957년에 소령으로 전역하였다. 같은 해 합동통신 외신기자가 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 관련 기사가 외신의 이목을 끌어 1959년 풀브라이트 재단 후원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았다.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장 재직시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안건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를 썼다가 투옥되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호적 기사를 거부하다가 1968년 해직당하였다.

그는 1970년 8월 「미군감축과 한‧일 안보관계의 전망」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의 출간은 리영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民靑學聯事件)이 발발하자 그해 11월 27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국민선언’을 발표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76년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977년 『우상과 이성』과 『8억인과의 대화』를 출판하였으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980년에 출소하였다. 이후 교수직으로 복직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7일에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구속되었고 다시 해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활동을 이어나가 1982년 『중국백서』와 1983년 『10억인의 나라:마오쩌둥 이후의 중국대륙』을 출간하였다. 1984년에 한양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였고, 『분단을 넘어서』를 출간하였고, 1987년 『역설의 변증:통일과 전후세대와 나』를 출간하였다. 이후 미국의 버클리대학교 아시아학과 부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1988년 『한겨레』의 이사 및 논설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 책임문제로 릴리 주한 미국대사와 공개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를 발표한다. 1989년에는 북한 취재기자단 방북기획 건이 국가보안법을 어겼다 하여 안기부에 구속‧기소되었다가 160일 만에 석방되었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통일부총리 한완상의 추천으로 통일정책평가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 등의 내용을 담은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를 출간하였고, 2005년에는에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2006년 단재언론상‧ 2000년 만해상 실천상 등을 수상하였다. 묘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있다.

[참고문헌]

『리영희 평전』
『경향일보』(2010.12.8)

[집필자]

이민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