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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우(千寬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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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후석(後石)
생년1925
졸년1991
시대대한민국
본관영양(潁陽)
활동분야언론출판 > 언론인
천명선(千命善)
출생지충청북도 제천
저서『근세조선사연구(近世朝鮮史硏究)』
저서『고조선사삼한사연구(古朝鮮史三韓史硏究)』

[상세내용]

천관우(千寬宇)
1925년∼1991년. 언론인‧역사학자. 본관은 영양(潁陽). 호는 후석(後石). 충청북도 제천 출생. 천명선(千𠇮善)의 둘째 아들이다.

청주중학교를 거쳐,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초 한국사연구에 뜻을 두어 대학졸업논문으로 「반계유형원연구(磻溪柳馨遠硏究)」를 쓰고 사학과의 조수를 지냈으나 6‧25로 부산에 피난, 1951년 대한통신(大韓通信)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도미하여 약 1년간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한 뒤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에 발탁되고, 1956년부터 약 3년간 조선일보 논설위원 및 편집국장으로 근무함으로써 언론인으로 본격적인 활약을 하였다.

그뒤 민국일보 편집국장, 서울일일신문 주필을 거쳐 196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주필로 활동하다가 1968년 『신동아(新東亞)』 필화사건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韓國新聞編輯人協會)부회장에 선임되어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뒤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하여,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民主守護國民協議會)의 창립과 동시에 공동대표로 추대되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民主回復國民會議)가 결성되자 공동대표로 피선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유신체제(維新體制) 아래 정부기관의 감시와 탄압으로 사회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자, 집에 칩거하며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주목되는 연구성과를 발표하여왔으나, 약 10년간 지속된 칩거생활중에는 특히 한국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으로 정치적 여건이 바뀌자 사회활동을 재개,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가 1981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의 직임을 맡아 남북통일의 정책방향과 민간운동에 간여하였고, 뒤이어 1985년 국정자문위원에 추대되었다.

또한, 1981년 한국일보 상임고문이 되어 컬럼을 집필하는 등 언론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건국대학교 대우교수, 인하대학교 객원교수로서 한국사를 교수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및 한국사상사학회(韓國思想史學會) 회장으로 학술‧문화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한국출판문화상(저작상)과 외솔상을 받았다.

언론활동과 관련하여 『밀물썰물』『언관사관(言官史官)』의 저서가 있고, 한국사관계 저서로는 『근세조선사연구(近世朝鮮史硏究)』『고조선사삼한사연구(古朝鮮史三韓史硏究)』『가야사연구(加耶史硏究)』『인물로 본 한국고대사』『한국사의 재견』『한국근대사 산책(散策)』 등이 있다.

소신이 굳은 대표적 언론인으로서 출중한 학문적 연구업적을 쌓았고, 한국사학자로서는 아카데미즘사학이 아닌 사론(史論)위주의 민간사학의 전통을 이으며, 한국사를 대중화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正音文化社, 1985)
韓國思想史學 4‧5합집-千寬宇先生 追念論集-(韓國思想史學會, 1994)

[집필자]

민현구(閔賢九)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