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丁一權)
[상세내용]
정일권(丁一權)
1917년 11월 21일∼1994년 1월 17일. 대한민국의 군인.정치가. 본관은 나주(羅州). 함경북도 경원 출신. 호는 청사(淸史).
한국군 창설 초기의 주요 인물로, 6.25전쟁 당시 육해공군총사령을 맡았다. 대장으로 예편한 이후 각국 대사를 역임했고, 5.16 이후에는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8.9.10대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중국 만주(滿洲)의 간도(間島)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광명중학교(光明中學敎)를 졸업하고 일본이 만주국(滿洲國)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5기)를 거쳐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군대인 만주국군(滿洲國軍)의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 당국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46년 1월 그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한국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正尉:대위에 해당함)로 임관하였다. 1946년 12월에 경비대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급속히 진급, 1949년 2월에 육군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蔡炳德) 육해공군총사령관이 전사하자, 1950년 7월 육군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그 뒤 1951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군참모대학에 입교하여 1952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귀국 뒤 1954년 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6월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 백선엽, 이형근 등과 소위 ‘3대장 파벌정립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군에서 예편과 동시에 터키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1962년까지 프랑스주재 대사, 미국주재 대사, 브라질.콜롬비아.칠레.아르헨티나.파라과이.에콰도르 등의 겸임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정변 세력이 민간인으로 옷을 바꾸어 입고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민간정권을 수립하려는 준비를 하던 시기인 1963년 4월에 무임소 대사 자격으로 귀국한 뒤, 그 해 12월 민간화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5개월 뒤, 1964년 5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70년 12월 정인숙여인 피살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하였으며, 1966년 12월부터 1967년 4월까지의 기간 중에는 외무부장관을 겸임 하였다. 총리 사임과 동시에 박정희에 의해 민주공화당 총재상임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 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 5월 박정희에 의해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 단행된 10월 유신 이후 첫 번째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인 1973년 2월의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유신체제하에서 1979년까지 국회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9년 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연맹회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5.17사태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太愚)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2월에는 한국자유총연맹(韓國自由總聯盟)의 발기인 및 총재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정일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는 역대 최장수 국무총리(1964-1970)이자 국회의장(1973-1979)로 활동하며, “현대판 황희”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만주국군 당시 활동으로 인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기 ‘만주인맥’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일협상을 주도했다. 회고록으로 『전쟁과 휴전』이 있다.
오랜 군복무와 관직복무 및 외교관생활 등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훈장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충무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금성).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고 외국에서는 미국.대만(臺灣).일본.서독.프랑스.그리스.아르헨티나.필리핀.태국.말레이시아.남베트남 등으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다.
한국군 창설 초기의 주요 인물로, 6.25전쟁 당시 육해공군총사령을 맡았다. 대장으로 예편한 이후 각국 대사를 역임했고, 5.16 이후에는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8.9.10대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중국 만주(滿洲)의 간도(間島)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광명중학교(光明中學敎)를 졸업하고 일본이 만주국(滿洲國)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5기)를 거쳐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군대인 만주국군(滿洲國軍)의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 당국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46년 1월 그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한국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正尉:대위에 해당함)로 임관하였다. 1946년 12월에 경비대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급속히 진급, 1949년 2월에 육군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蔡炳德) 육해공군총사령관이 전사하자, 1950년 7월 육군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그 뒤 1951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군참모대학에 입교하여 1952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귀국 뒤 1954년 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6월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 백선엽, 이형근 등과 소위 ‘3대장 파벌정립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군에서 예편과 동시에 터키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1962년까지 프랑스주재 대사, 미국주재 대사, 브라질.콜롬비아.칠레.아르헨티나.파라과이.에콰도르 등의 겸임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정변 세력이 민간인으로 옷을 바꾸어 입고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민간정권을 수립하려는 준비를 하던 시기인 1963년 4월에 무임소 대사 자격으로 귀국한 뒤, 그 해 12월 민간화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5개월 뒤, 1964년 5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70년 12월 정인숙여인 피살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하였으며, 1966년 12월부터 1967년 4월까지의 기간 중에는 외무부장관을 겸임 하였다. 총리 사임과 동시에 박정희에 의해 민주공화당 총재상임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 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 5월 박정희에 의해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 단행된 10월 유신 이후 첫 번째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인 1973년 2월의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유신체제하에서 1979년까지 국회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9년 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연맹회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5.17사태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太愚)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2월에는 한국자유총연맹(韓國自由總聯盟)의 발기인 및 총재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정일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는 역대 최장수 국무총리(1964-1970)이자 국회의장(1973-1979)로 활동하며, “현대판 황희”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만주국군 당시 활동으로 인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기 ‘만주인맥’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일협상을 주도했다. 회고록으로 『전쟁과 휴전』이 있다.
오랜 군복무와 관직복무 및 외교관생활 등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훈장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충무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금성).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고 외국에서는 미국.대만(臺灣).일본.서독.프랑스.그리스.아르헨티나.필리핀.태국.말레이시아.남베트남 등으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문정인.김세중 편, 선인, 2004)
『전쟁과 휴전: 정일권(丁一權)회고록』(정일권, 동아일보사, 1986)
「맑지 않은 삶, 청사(淸史) 정일권」(노영기, 『내일을 여는 역사』31, 2008)
「만주국군(滿洲國軍) 속의 조선인(朝鮮人) 장교와 한국군」(신주백, 『역사문제연구』9, 200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http://www.history.go.kr)
대한민국헌정회(http://www.rokps.or.kr)
조선일보 인물자료(http://www.chosun.com)
『전쟁과 휴전: 정일권(丁一權)회고록』(정일권, 동아일보사, 1986)
「맑지 않은 삶, 청사(淸史) 정일권」(노영기, 『내일을 여는 역사』31, 2008)
「만주국군(滿洲國軍) 속의 조선인(朝鮮人) 장교와 한국군」(신주백, 『역사문제연구』9, 200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http://www.history.go.kr)
대한민국헌정회(http://www.rokps.or.kr)
조선일보 인물자료(http://www.chosun.com)
[집필자]
양동안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 2012-09-1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내용으로 대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