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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崔振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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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최명록(崔明錄)
이명(異名)최명록(崔明祿)
이명(異名)최희(崔喜)
생년?(미상)
졸년1945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함경북도 온성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최진동(崔振東)
미상∼1945년. 독립운동가. 일명 명록(明錄, 明祿)희(喜). 함경북도 온성 출신.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군(中國軍)에 가입, 군사지식과 전투실력을 함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의 3형제와 같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분투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 독군부(督軍府)를 조직하고 부장(府長)에 취임하였다.

본부를 왕청현(汪淸縣)에 두고 사령관에 이봉남(李鳳南), 부사령관에 이원(李園), 참모장에 김호석(金浩錫)을 각각 임명하고 무기를 구입, 군인 500여명을 장총으로 무장시키고 4개 중대로 나누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태범(李泰範) 등과 함께 청년 300여명을 모집, 도독부(都督府)를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어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바, 모든 일을 항상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와 상호협조하였다.

3‧1운동 이후 각 독립군부대는 일제군경과 항전을 계속하면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함께 종성(鍾城)의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일본 제19사단 소속 야스가와(安川) 소좌(少佐)가 거느리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려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계속되는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국경수비의 어려움을 느낀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왔다.

같은해 7월 일본군은 1개 대대병력으로 봉오동을 포위, 공격해왔는데, 홍범도와 함께 진두지휘하여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봉오동의 주민들을 미리 피난시키고 일본군들을 고스란히 봉오동으로 가두어놓고 사방 고지에서 사격을 가하여 사살 157명, 중경상자 300여명이라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사령관으로, 홍범도는 제1연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 화양현 삼도구 다산리(和陽縣三道溝多山里)부근에서 제3연대장으로,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1연대장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 600여명을 사살하였다.

그뒤 북간도시베리아 등지에서 부하 수천명을 거느리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1924. 1. 10.)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東文社書店, 1946)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韓國獨立運動史 3(國史編纂委員會, 1967)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집필자]

이상태(李相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