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수(柳興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D765C218B1850X0 |
이명(異名) | 차상춘(車常春) |
호(號) | 효암(曉巖) |
생년 | 1921 |
졸년 | ?(미상)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상세내용]
유흥수(柳興洙)
1921∼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효암(曉巖)이고, 다른 이름은 차상춘(車常春)이다. 본적은 충청남도 서산(瑞山)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박효준(朴孝濬) 등과 함께 대구 봉산정(鳳山町)에 있던 이태길(李泰吉)의 하숙집에서 문예활동을 표방하며 항일학생결사조직인 대구사범학교문예부(大邱師範學校文藝部)를 조직하였다.
1941년 2월 15일 같은 학교 재학생 이태길‧배학보(裵鶴甫)‧권쾌복(權快福)‧문홍의(文洪義)‧강두안(姜斗安) 등 15명과 함께 모여 다혁당(茶革黨)이라는 항일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후 타교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당원으로 받아들이며 조직을 확대해 나가면서 독립 촉진을 위한 문학‧학술‧미술‧운동 등 각 분야의 민족문화육성 전문가 배양에 힘썼고, 이때 유흥수(柳興洙)은 다혁당의 문예창작을 책임 맡아 활동하였다.
1941년 3월부터 5월까지 당의 활동상황 및 조직 확대 등에 대해 협의하였으며, 교육 현장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타파를 위한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1941년 8월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를 통한 민족독립운동 계획 등이 실린 대구사범학교 윤독회 간행물 『반딧불』을 손에 넣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미결수로 지낸 2년여간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감하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박효준(朴孝濬) 등과 함께 대구 봉산정(鳳山町)에 있던 이태길(李泰吉)의 하숙집에서 문예활동을 표방하며 항일학생결사조직인 대구사범학교문예부(大邱師範學校文藝部)를 조직하였다.
1941년 2월 15일 같은 학교 재학생 이태길‧배학보(裵鶴甫)‧권쾌복(權快福)‧문홍의(文洪義)‧강두안(姜斗安) 등 15명과 함께 모여 다혁당(茶革黨)이라는 항일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후 타교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당원으로 받아들이며 조직을 확대해 나가면서 독립 촉진을 위한 문학‧학술‧미술‧운동 등 각 분야의 민족문화육성 전문가 배양에 힘썼고, 이때 유흥수(柳興洙)은 다혁당의 문예창작을 책임 맡아 활동하였다.
1941년 3월부터 5월까지 당의 활동상황 및 조직 확대 등에 대해 협의하였으며, 교육 현장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타파를 위한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1941년 8월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를 통한 민족독립운동 계획 등이 실린 대구사범학교 윤독회 간행물 『반딧불』을 손에 넣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미결수로 지낸 2년여간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감하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1988)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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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