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조(朴啓祚)
[상세내용]
박계조(朴啓祚)
1918년∼1955년. 배구인. 경기도 강화 출생.
경성고등보통학교(현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여 4학년 때부터 배구선수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1935년 철도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중 193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이 만주원정경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서울에서 비공식경기를 가진 바 있었다. 당시 그의 뛰어난 기술과 학업의욕을 인정받아 1939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그 대학 배구팀이 전승의 상아탑을 구축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탁월한 경기기술과 지도력으로, 한국인으로서 일본대학팀 주장을 맡기도 하고 일본대표팀의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광복 후 이화여자고등학교‧체신부‧해군‧세관 배구팀 등을 창단하고, 후진양성과 배구인구의 저변확대 및 경기기술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5년 대한배구협회가 창립된 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배구협회위원으로 활약하고, 그뒤 1954년까지 대한배구협회이사장직을 맡았다. 같은해 10월 홍콩 원정경기에서는 코치로 활약한 바 있다.
그당시 국제배구경기는 9인제경기에서 6인제경기로 경기방법이 바꾸어지던 때로서, 6인제경기에 대한 인식부족과 경기기술 및 지도자의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그는 6인제배구를 체계화하고 보급하는 데 헌신적 노력을 경주하여, 1959년 제40회전국체육대회에 처음으로 6인제배구경기가 채택되었다.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후세에까지 기리기 위하여 1962년 4월 제1회박계조배 쟁탈 전국남녀배구대회를 창설하여 현재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경성고등보통학교(현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여 4학년 때부터 배구선수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1935년 철도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중 193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이 만주원정경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서울에서 비공식경기를 가진 바 있었다. 당시 그의 뛰어난 기술과 학업의욕을 인정받아 1939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그 대학 배구팀이 전승의 상아탑을 구축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탁월한 경기기술과 지도력으로, 한국인으로서 일본대학팀 주장을 맡기도 하고 일본대표팀의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광복 후 이화여자고등학교‧체신부‧해군‧세관 배구팀 등을 창단하고, 후진양성과 배구인구의 저변확대 및 경기기술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5년 대한배구협회가 창립된 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배구협회위원으로 활약하고, 그뒤 1954년까지 대한배구협회이사장직을 맡았다. 같은해 10월 홍콩 원정경기에서는 코치로 활약한 바 있다.
그당시 국제배구경기는 9인제경기에서 6인제경기로 경기방법이 바꾸어지던 때로서, 6인제경기에 대한 인식부족과 경기기술 및 지도자의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그는 6인제배구를 체계화하고 보급하는 데 헌신적 노력을 경주하여, 1959년 제40회전국체육대회에 처음으로 6인제배구경기가 채택되었다.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후세에까지 기리기 위하여 1962년 4월 제1회박계조배 쟁탈 전국남녀배구대회를 창설하여 현재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참고문헌]
大韓體育會50年史(大韓體育會, 1970)
체육한국인(체육부, 1986)
체육한국인(체육부, 1986)
[집필자]
곽형기(郭亨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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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