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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중흡(吳仲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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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10(융희 4)
졸년1939
시대항일기
활동분야군인 > 군인

[상세내용]

오중흡(吳仲洽)
1910년(융희 4)∼1939년. 일제 강점기 항일연합군‧사회주의운동가. 출생지는 함경북도 온성(穩城)이다.

가난한 농부의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다. 형 오중화(吳仲和)와 동생 오중선(吳仲善)‧오중립(吳仲立) 등이 있다.

1914년 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化鄕)으로 거주지를 옮겨 살았다.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농사짓는 일에 종사하면서 소년선봉대‧공산청년단‧농민협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붉은 5월 투쟁’에 참여하였다.

1931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이 되어 석현단(石峴團)지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1932년 소반령(小盤嶺)에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3년 5월 소왕청 유격지구로 거주지를 옮겨 왕청현 서대파(西大坡) 항일유격대 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계속해서 청년의용군 대원과 항일유격대 중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獨立師) 제3단 정치지도원‧연장(連長) 등을 역임하였다.

1936년 여름 동북항일연군 제6사 제7단 제4련장직을 맡았다.

1937년 6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소속 대원으로서 보천보(普天堡)전투에 참전하였다.

1938년 김일성(金日成)이 인솔하던 제1로군 제2방면군 제7연대장직에 올라 ‘고난의 행군’ 때 사령부 보위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1939년 돈화현(敦化縣) 육과송(六棵松)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슬하에 6‧25전쟁 후 김일성의 추천으로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다녀왔으며, 김정일의 심복이자 조선노동당 총참모장직 등을 지낸 장남 오극렬(吳克烈) 등을 두었다.

[참고문헌]

연합뉴스(1995.2.25)

[집필자]

박상수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