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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모(李忠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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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6(건양 1)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사회주의자

[상세내용]

이충모(李忠模)
1896년(건양 1) 7월 6일∼미상.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운면(龍雲面)이다.

양복점에서 직공생활을 하였다.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노동당 결성에 동참하여 사회주의사상 전파와 동지 규합 등에 힘쓰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월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1월 북풍회(北風會) 회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4단체합동위원회 결성에 가담하고 합동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조선공산당 내에서 북풍회 종파에 동참한 일로 권한정지 처분을 받았다.

1926년 1월 4단체합동위원회 주최의 레닌추도강연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같은 해 2월 광주청년회가 광주노동공제회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계급투쟁에 비추어본 광주청년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광주청년회의 행동을 비판하였다. 4월 정우회(正友會) 결성에 가담하고 상무집행위원직을 맡았다. 6월 6‧10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가 7월 2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다음 해 2월 만기 출감하였다.

1931년 1월 중국 만주(滿洲)로 건너가서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을 운영하였으며, 러시아를 드나들며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44년 8월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이사회가 중경(重慶)에서 개최되었을 때 소련 내에서 펼쳐지고 있는 한인(韓人)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보고하였다. 같은 해 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달 23일 중국 국민당(國民黨) 앞으로 「재소한교문제(在蘇韓僑問題)와 한국의 장래」라는 의견서를 보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1926.7.24) 외
獨立新聞 重慶版(1944.8.29)
용의조선인명부
資料韓國獨立運動(秋憲樹編)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