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락(徐相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0C1B77DB1835X0 |
이명(異名) | 서영윤(徐永潤) |
이명(異名) | 서영림(徐永林) |
생년 | 1893(고종 30) |
졸년 | 1923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우국지사 |
[상세내용]
서상락(徐相洛)
1893년(고종 30) 3월 23일~1923년 5월 28일. 일제 강점기 우국지사. 다른 이름은 서영윤(徐永潤)‧서영림(徐永林)이다. 출신지는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성북면(城北面)이다.
1918년 1월 만주(滿洲) 퉁화현(通化縣)에 있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수료하였고,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어 같은 학교 학생인 김원봉(金元鳳)‧김옥(金玉) 등과 친분을 맺고,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에서 12명의 동지와 함께 항일무장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설립하였다. 또한 1919년 11월 9일에는 의열단의 제1차 거사계획으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 등 주요기관의 파괴와 친일 앞잡이 제거 등을 위해 곽재기(郭在驥) 등과 함께 다량의 폭탄‧권총을 국내로 반입하였다.
1920년 6월 반입한 무기로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의열단 단원인 신철휴(申喆休)와 함께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 2,000원을 의열단에 전달하였다.
1922년 4월 의열단 본부를 상하이[上海]로 이전할 때 재호단장으로 활약하였고, 1922년 여름에는 해외 독립운동의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독일로 망명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5월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18년 1월 만주(滿洲) 퉁화현(通化縣)에 있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수료하였고,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어 같은 학교 학생인 김원봉(金元鳳)‧김옥(金玉) 등과 친분을 맺고,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에서 12명의 동지와 함께 항일무장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설립하였다. 또한 1919년 11월 9일에는 의열단의 제1차 거사계획으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 등 주요기관의 파괴와 친일 앞잡이 제거 등을 위해 곽재기(郭在驥) 등과 함께 다량의 폭탄‧권총을 국내로 반입하였다.
1920년 6월 반입한 무기로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의열단 단원인 신철휴(申喆休)와 함께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 2,000원을 의열단에 전달하였다.
1922년 4월 의열단 본부를 상하이[上海]로 이전할 때 재호단장으로 활약하였고, 1922년 여름에는 해외 독립운동의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독일로 망명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5월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차호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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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