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근(朴智根)
[상세내용]
박지근(朴智根)
1890년(고종 27) 10월 14일∼1962년 6월 26일. 일제 강점기 관료. 창씨 개명한 이름은 송산청(松山淸)이다. 본적은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황등면(黃登面)이다.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했으며, 1919년까지 순창군과 익산군의 군서기로 근무하였다. 1927년과 1931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학교평의원을 지냈다. 1933년과 1941년에는 각각 민선과 관선으로 전라북도 도회의원을 역임하였고, 1935년에는 익산군 황등면 면협의회원을 지냈다. 1934년에는 이리세무서 소득조사위원과 익산군 소작위원회 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황등산업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호남산업주식회사 전무로도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기원 2600년을 축하하며 일본군 승리를 기원하는 광고 글을 『경성일보』에 게재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북도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재직하였고, 매년 열리는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였다. 1942년에 중추원 회의에서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강조하며 징병제의 효과적인 실시를 위해서 육군특별지원병 훈련소를 늘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조선반도개발을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바치고 애쓴 조선 내 일본인을 우대하는 방법을 찾고,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선공로자명감』에는 일처리가 재빠르고 위엄있는 모습을 지녔으며 실업을 천대하는 지방의 악습을 타파하고 의연히 재계에서 물러 났다는 인물평이 실려 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했으며, 1919년까지 순창군과 익산군의 군서기로 근무하였다. 1927년과 1931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학교평의원을 지냈다. 1933년과 1941년에는 각각 민선과 관선으로 전라북도 도회의원을 역임하였고, 1935년에는 익산군 황등면 면협의회원을 지냈다. 1934년에는 이리세무서 소득조사위원과 익산군 소작위원회 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황등산업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호남산업주식회사 전무로도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기원 2600년을 축하하며 일본군 승리를 기원하는 광고 글을 『경성일보』에 게재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북도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재직하였고, 매년 열리는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였다. 1942년에 중추원 회의에서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강조하며 징병제의 효과적인 실시를 위해서 육군특별지원병 훈련소를 늘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조선반도개발을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바치고 애쓴 조선 내 일본인을 우대하는 방법을 찾고,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선공로자명감』에는 일처리가 재빠르고 위엄있는 모습을 지녔으며 실업을 천대하는 지방의 악습을 타파하고 의연히 재계에서 물러 났다는 인물평이 실려 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37∼1942)
조선총독부관보(1933.5.29) 외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
조선총독부관보(1933.5.29) 외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
[집필자]
문혜경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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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