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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태(安敬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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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88(고종 25)
졸년1950
시대항일기
활동분야독립운동가

[상세내용]

안경태(安敬泰)
1888년(고종 25) 7월 27일∼1950년 6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현 전라북도 군산시)이다.

전라북도 옥구군에 소재한 예수교병원에 입사하여 사무원으로 재직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행되던 와중 김병수(金炳洙)는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전라도로 내려와서 당시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현 공주영명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박연세(朴淵世)에게 전달하였다. 박연세는 동료 교사인 김수영(金洙榮)‧이두열(李斗悅) 등과 예수교병원 인사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시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안경태(安敬泰)는 병원에서 근무하던 동료 송기주(宋基周)‧양성도(楊成道) 등과 함께 계획에 가담하였다.

전라북도 군산(群山)에서 열리는 장날에 맞춰 거사일을 1919년 3월 6일로 정하고, 사전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해두었다. 거사 하루 전인 3월 5일 오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면서 영명중학교 교사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검거망을 피했던 김윤실(金潤實) 등과 함께 긴급회의를 하였고, 거사를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오후에 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무력탄압을 받아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31일에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으로 이송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공소를 제기하였지만 대구복심법원에서 이송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상고하였지만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으로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