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고일청(高一淸)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CE0C77CCCADB1886X0
이명(異名)고봉일청(高峰一淸)
생년1886(고종 23)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활동분야관료

[상세내용]

고일청(高一淸)
1886년(고종 23) 1월 14일∼미상. 일제 강점기 관료. 창씨한 이름은 고봉일청(高峰一淸)이다. 본적은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의주읍(義州邑)이다.

1908년(융희 2) 대한협회 회원을 지내고, 1910년(융희 4)부터 1911년까지 평안북도 용천군 서기를 지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3‧1운동 이후 조선인 관리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상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임시공채관리국장,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임시 정부기금 5만 원을 횡령해 독일로 유학, 베를린 대학 법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장을 지냈으며, 1933년에는 평안북도 도회의원이 되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과 1942년 신의주 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일본의 통치에 협력하는 많은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39년에는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 신의주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내선일체의 강화와 일제의 황국신민화를 정책적으로 선전하였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1944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서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였다.

일제의 정책에 부응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여러 가지 모금활동에 앞장섰다. 1937년 전적기념관 건설 기금모집단체인 보승회 회장을 지내며 10만 원을 모금하였고, 같은 해 고사포 헌납 기금모집 모임의 좌장으로 육천 원을 모금하기도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38년에는 수년 간 사회교화에 종사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사회교화공적자표창을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1935년 편찬한『조선공로자명감』에 학식과 포부가 남달랐고, 인격과 수완이 평안북도 제일이었다는 평이 실려 있다.

슬하에 의주농업학교를 졸업한 고봉인(高鳳人)과 고봉소(高鳳韶)가 두 명의 아들이다.

[참고문헌]

경성일보(1937. 6. 2)
국민총력조선연맹조직병역원명부(1944)
조선임전보국단개요(1941)
조선총독부관보(1933. 5. 20)(1935. 4. 25) 등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
독립운동사자료집(1975, 1984)
사상휘보(1936. 5. 31)

[집필자]

문혜경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