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화(桂和)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CC4D654FFFFB1884X0 |
이명(異名) | 계활(桂活) |
호(號) | 백연(白囦) |
생년 | 1884(고종 21) |
졸년 | 1928 |
시대 | 항일기 |
본관 | 수안(遂安)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공훈 | 건국훈장 국민장 |
[상세내용]
계화(桂和)
1884년(고종 21)∼1928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수안(遂安). 본명은 계활(桂活). 호는 백연(白囦).
일찍이 만주로 이주하여 대종교에 입교, 서일(徐一) 등과 만주에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항일운동에 종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뒤 중광단을 개편하여 항일군사단체인 대한정의단을 조직, 애국청년을 포섭하여 독립군을 편성하고 『일민보(一民報)』‧『한국보(韓國報)』 등 독립운동신문을 발행하여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그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유로 대한정의단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칭하고 재무부장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모금된 자금은 시베리아를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거나 독립군의 군량미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1920년 간북(墾北) 북부총판부 재무관서의 재무관이 되어 만주교민들의 자치 및 생활향상에 힘썼고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뒤 북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내왕하며 계속 항일운동을 하였고, 대종교 포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일찍이 만주로 이주하여 대종교에 입교, 서일(徐一) 등과 만주에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항일운동에 종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뒤 중광단을 개편하여 항일군사단체인 대한정의단을 조직, 애국청년을 포섭하여 독립군을 편성하고 『일민보(一民報)』‧『한국보(韓國報)』 등 독립운동신문을 발행하여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그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유로 대한정의단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칭하고 재무부장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모금된 자금은 시베리아를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거나 독립군의 군량미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1920년 간북(墾北) 북부총판부 재무관서의 재무관이 되어 만주교민들의 자치 및 생활향상에 힘썼고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뒤 북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내왕하며 계속 항일운동을 하였고, 대종교 포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집필자]
신재홍(申載洪)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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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