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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철(安鍾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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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광안종철(廣安鍾哲)
생년1881(고종 18)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본관광주(廣州)
활동분야관료

[상세내용]

안종철(安鍾哲)
1881년(고종 18) 2월 24일∼미상. 일제 강점기 관료. 창씨한 이름은 광안종철(廣安鍾哲)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본적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백석면(白石面)이다.

1907년(융희 1)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한 후 탁지부 주사와 서기랑을 지냈으며, 1910년(융희 4) 조선총독부 통역생이 되었다. 1912년 사립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전라남도 장흥군수에 임명되었고, 재임 기간 중인 1916년 전라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다. 1921년 군수시찰단으로 일본을 시찰하였으며, 1923년 전라남도 나주군수에 임명되었다.

1924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았고, 1925년 고등관 4등에 서위되었으며, 1928년 일본 정부로부터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9년 순천군수를 지냈고, 같은 해 7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2년부터 약 4년간 충청북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1935년에는 충청북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과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각각 훈4등 서보장과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어 광복 직전까지 조선총독부 자문에 응하였다.

1940년 동민회본부의 상임이사를 역임하였고, 1941년 국민협회 이사를 지내는 한편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황도정신 선양과 전시체제에 국민생활 쇄신 등의 달성을 위해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에서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하였다. 1942년부터 전시동원체제 하에서의 황국신민화와 후방의 의무를 지향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평의원으로 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학도병 제도를 지원하기 위하여 충청남도 지역에서 순회 연설을 하였다.

[참고문헌]

국민총력조선연맹조직및역원명부(1942.6) 외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조선인사흥신록(1935)
조선총독부관보(1910.10.31) 외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 제122권(1940)
朝鮮臨戰報國團結成式擧行ニ關スル件(1941.10.24)
경성일보(1921.4.9)
매일신보(1943.8.4) 등

[집필자]

김은지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