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문용기(文鏞祺)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B38C6A9AE30B1878X0
생년1878(고종 15)
졸년1919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전라북도 익산
공훈건국포장

[상세내용]

문용기(文鏞祺)
1878년(고종 15)∼1919년. 독립운동가. 전라북도 익산 출신.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3월 26일 이래 격렬히 전개되어온 만세시위운동을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약속된 장날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백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그의 지휘에 의하여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명으로 늘어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쿠리를 휘두르며 무차별 진압을 강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일본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그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 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헌병은 그를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니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