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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준(朴寬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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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75(고종 12)
졸년1945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종교 > 기독교인
출신지평안북도 영변

[상세내용]

박관준(朴寬俊)
1875년∼1945년. 기독교 장로. 평안북도 영변 출신.

1900년경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보수주의적 신앙에 침잠하였고, 한방의를 배워 1917년 4월 조선 의생(醫生)의 면허를 받았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개업하다가 1935년 평양 선교정(船橋町)에서 십자의원(十字醫院)을 운영하였다.

1920년대부터 ‘아세아인 5억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기독교화하는 길밖에 없다. ’라는 계시를 계속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신문에서 평양의 삼숭(三崇), 즉 숭실전문‧숭실중학‧숭의여중이 신사불참배로 폐교위기에 놓여 있다는 기사를 읽은 뒤 신사참배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제와 합법적으로 싸워 한국교회를 구출하기로 결심하였다. 곧,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니시모토(西本) 평남지사, 미나미(南次郞) 총독 등에게 보내었고,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1939년 1월 신사참배문제로 선천 보성(保聖)중학교 교사직을 사퇴한 안이숙(安利淑)동경(東京)에서 유학하고 있던 아들 영창(永昌)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인 닛비키(日疋信亮)우가키(宇垣一成)아베(阿部磯雄) 등을 방문하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여의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마침내 일본 중의원에 직접 청원하는 길밖에 없음을 판단하고, 신종교법안이 심의되는 일자를 골라 1939년 3월 24일 회의장에 들어갔다.

종교법안이 상정되어 심의가 이루어지던 중 미리 준비되었던 건의서를 “여호와 하느님의 사명이다.”라고 외치면서 단상을 향하여 던졌다. 회의장은 수라장이 되면서 그는 즉시 붙잡혔고 32일간 경시청에 갇혀 있었다.

귀국 후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 검속되어 6년간의 옥고 끝에 평양의 옥중에서 죽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제가 국체변혁모의의 중죄로 다스릴 만큼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던 운동인데, 그는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참고문헌]

韓國基督敎史硏究(金良善, 基督敎文化社, 1971)
太陽神과 싸운 이들(안용준, 세종문화사, 1972)

[집필자]

민경배(閔庚培)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