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형식(閔衡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D615C2DDB1875X0 |
자(字) | 공윤(公允) |
호(號) | 우하(又荷) |
생년 | 1875(고종 12) |
졸년 | 194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형식(閔衡植)
1875년(고종 12)∼1947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윤(公允), 호는 우하(又荷).
민씨척족정권의 대표적 인물인 민영준(閔泳駿: 뒤에 泳徽로 개명)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189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법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을사오적(乙巳五賊)암살계획에 찬동하여 1만4천냥을 희사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황주(黃州) 철도(鐵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특사로 풀려났다.
그뒤 신민회(新民會)회원이 되어 반일운동에 가담, 『조양보(朝陽報)』의 발행자금과 각종 학회 및 학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등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민씨척족정권의 대표적 인물인 민영준(閔泳駿: 뒤에 泳徽로 개명)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189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법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을사오적(乙巳五賊)암살계획에 찬동하여 1만4천냥을 희사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황주(黃州) 철도(鐵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특사로 풀려났다.
그뒤 신민회(新民會)회원이 되어 반일운동에 가담, 『조양보(朝陽報)』의 발행자금과 각종 학회 및 학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등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韓末官人의 經歷一般(崔永禧, 史學硏究 21, 1969)
[집필자]
유영익(柳永益)
명 : "형식(衡植)"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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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