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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수(車炳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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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73(고종 10)
졸년1928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남도 용강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차병수(車炳修)
1873년(고종 10)∼1928년.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용강 출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연통제연락책.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자, 김하원(金河苑)이기범(李基範) 등 동지와 함께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격문을 초안, 살포하였고, 결사반대 연설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그뒤 5년간 고향을 비롯하여 평안북도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연설과 격문으로 폭로하여 구국의식을 고취하였고, 청소년을 상대로 자립의식을 심어주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 고향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그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요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진로와 그 방법을 모색한 그는 임시정부와 국내외와의 연락을 위한 연통제(聯通制) 조직을 이용, 독립운동에 참획하여 1921년 국내연락 책임을 맡고 비밀리에 귀국하여 평양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논밭을 팔아 평양경찰서 정문 건너편 잡화상회를 빌려 ‘자전거상회’라는 위장간판을 걸고, 연통제의 비밀연락장소를 제공하면서 직접 임시정부와의 각종 기밀문서 전달과 제작배포를 맡는 한편, 군자금이 모집되는 대로 임시정부에도 보내고 국내의 독립투사들에게도 조달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지원하였다.

미국 등지에서의 군자금을 직접 모집하기 위하여 동지들과 빈번한 연락을 취하면서 준비를 서두르다가 일본형사에게 붙잡혔다.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서울형무소를 전전하다가 8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1928년 3월 8일 고문의 여독으로 향리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韓國獨立運動史 2∼5(國史編纂委員會, 1966∼1969)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大韓帝國의 最後와 臨時政府의 活動(李炫熙, KBS사업단, 1983)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