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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성(李東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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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72(고종 9)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종교 > 기타

[상세내용]

이동성(李東成)
1872년(고종 9) 9월 17일∼미상. 일제 강점기 종교인. 본적은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강계읍(江界邑)이다.

1905년(광무 9)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일진회(一進會) 회장을 지냈으며, 1906년(광무 10) 일진회 만주(滿洲) 동변도(東邊道) 일대의 전권위원(全權委員)과 평안북도 지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융희 2) 평안북도 위원군 군수(郡守)로 활동하였고, 1910년(융희 4) 일진회 해산 시 분배금을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부터 1915년까지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동광(銅鑛)사무소 주임(主任)으로 근무한 뒤, 만주로 이주하여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만주보민회(滿洲保民會) 통화지부(通化支部)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만주보민회는 만주에서 일본의 경찰력이 행사되지 못하는 지역에 설립되어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조선인의 식민체제 협력을 강요한 단체로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의 지휘와 감독을 받았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통화보통학교(通化普通學校) 교장과 1921년 제우교(濟愚敎) 포덕사(布德師)를 겸임하였다. 제우교는 일제의 종교분열정책에 의해 분리된 천도교(天道敎)의 유파로 친일성향의 시천교(侍天敎)의 일부와 합류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보민회를 조직하여 항일세력을 탄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924년 만주보민회가 해산할 당시 일제로부터 해산 분배금을 받았으며, 해산 뒤 재편된 조선인 민회(民會)에서 회장을 지냈다. 또한 독립운동세력의 내분 분열과 이탈을 획책하기 위해 선민부(鮮民府)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선민부의 후신인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에서 회장직을 맡아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탄압을 꾸준히 수행하였다. 이들 단체 모두 일본영사관으로부터 보조금과 무기를 지급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에 의해 만주국(滿洲國)이 세워진 이후에는 동변도특별공작대에 참가하여 통화현 지역을 중심으로 선무(宣撫)공작을 수행하였으며, 활동에 대한 공로로 만주국건국공로장(滿洲國建國功勞章)을 받았다.

[참고문헌]

만주국건국공로장(1934∼1936)
시정25주년기념관계(조선총독부 외사과, 1935)
대한제국직원록(1908)
일한합방비사 하(원서방, 1966)
朝鮮人ニ對スル施政關係雜件-保民會 제3권(1924.3.5)
朝鮮人ニ對スル施政關係雜件-保民會 제1권(1920.1)
외무성경찰사 제11권(不二出版, 1997) 등

[집필자]

도승현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