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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閔丙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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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소(景召)
호(號)의재(毅齋)
생년1858(철종 9)
졸년1940
시대조선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경식(閔敬植)
조부민영위(閔泳緯)

[상세내용]

민병석(閔丙奭)
1858년(철종 9)∼1940년. 조선 말기의 문신‧서도가.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의재(毅齋). 민영위(閔泳緯)의 손자이고, 민경식(閔敬植)의 아들이다.

1880년(고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 승지, 1884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에 등용되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이후 도승지로서 민응식(閔應植)과 상의, 장은규(張殷奎)일본에 밀파하여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6년부터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한성부좌윤예조참판‧육영공원변리(育英公院辨理)‧강화유수 등을 지냈다.

1889년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1894년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이때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조병세(趙秉世)의 탄핵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중 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장(淸將)과 내통, 일본세력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895년초 원주에 유배되었다.

1895년 민씨척족세력의 부활과 함께 사면된 뒤, 군부대신학부대신궁내부대신철도원총재(鐵道院摠裁) 등의 요직을 지냈다. 관직 외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직조단포주식회사(織造緞布株式會社)‧농업회사 등의 조직과 경영에 참여하는 한편,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민족항일기에는 조선인 대지주의 한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서도가로서도 이름이 났는데 특히 행서에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광화문에 있는 고종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와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고구려동명왕릉비(高句麗東明王陵碑)가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細井肇, 日韓書房, 1910)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집필자]

유영익(柳永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