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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盧相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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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팔(致八)
호(號)소눌(小訥)
생년1855(철종 6)
졸년1931
시대조선후기
본관광주(光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상세내용]

노상직(盧相稷)
1855년(철종 6)∼1931년. 일제 강점기 학자. 자는 치팔(致八)이고, 호는 소눌(小訥)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이방면(梨房面)이다.

부친은 우당(愚堂) 노호연(盧滈淵)이고, 생부 극재(克齋) 노필연(盧佖淵)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형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을 지낸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이 있다. 부인은 하태긍(河泰兢)의 딸 진양하씨(晉陽河氏)이다.

5세에 효경을, 12세에 사서삼경을 읽었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추원재(追遠齋)‧극기재(克己齋)‧금산서당(錦山書堂)‧자암초려(紫巖草廬) 등에서 강학했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당해 중국 안동현(安東縣)으로 가서 먼저 망명한 형 노상익과 합류하였다. 1911년 아들을 잃고 다시 밀양으로 돌아와 1912년 자암서당을 짓고 강학에 힘썼다. 1919년에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평생토록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척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며,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일산(一山) 조병규(趙昺奎) 등과 함께 경상남도 산청(山淸)과 함안(咸安) 지역의 학풍을 이끌었다. 생을 마감하였을 때 각지에서 1천여 명의 인사들이 몰려들 정도로 학문의 경지가 높았다.

슬하에 5남 노식용(盧寔容)‧노가용(盧家容)‧노정용(盧定容)‧노찰용(盧察容)‧노심용(盧審容)을 두었다.『성재선생문집(性齋先生文集)』‧『성호문집(星湖文集)』‧『하려집(下廬集)』 등을 편찬‧간행하였으며, 주요 저서로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역연제강(歷年提綱)』‧『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가락국사실고(駕洛國事實攷)』‧『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여사수지(女士須知)』‧『성리절요(性理節要)』‧『자암일록(紫巖日錄)』‧『소눌문집(小訥文集)』 등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동아일보(1931.3.23)
顧本錄
小訥文集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