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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균(申鳳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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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학암(鶴庵)
생년1866(고종 3)
졸년1907(융희 1)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의병

[상세내용]

신봉균(申鳳均)
1866년(고종 3) 1월 7일∼1907년(융희 1) 10월 7일. 조선 말기 의병장. 호는 학암(鶴庵)이다. 본적은 경상북도 풍기군(豊基郡) 상리면(上里面)이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 등이 강행되자 고향 경상북도 풍기에서 8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의거하였다.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충청북도 단양(丹陽)에 있는 적성(赤城)을 출발하여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충청북도 충주(忠州)로 통하는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아래에 진을 쳤다가 적군의 습격을 받고 풍기군 백운동(白雲洞) 송림으로 옮겼으나, 한밤중에 다시 적이 습격해오자 의병이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이때 부상을 당하여 소백산에 있는 초암사(草菴寺)에서 요양을 하였다.

1905년(광무 9)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6년(광무 10) 1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치권까지 빼앗기게 되자, 을미년에 의병활동에 함께 참가했던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1907년(융희 1)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까지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하면서 의병운동은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다시 활동을 전개 하던 중 같은 해 10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본군에게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義兵大將 鶴庵 申鳳均先生 行狀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