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식(閔愚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6B0C2DDB1864X0 |
생년 | 1864(고종 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부 | 민영목(閔泳穆) |
생부 | 민영필(閔泳弼) |
[상세내용]
민우식(閔愚植)
1864년(고종 1)~미상. 조선 말기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증조부는 민치복(閔致福)이고, 조부는 민태용(閔泰鏞)이다. 부친 민영목(閔泳穆)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조영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체결한 인물로, 개화주의자 박규수(朴珪壽) 등과 교류하면서 「한성순보」를 발간하는 데 참여했다가 갑신정변 때 참살당하였다. 생부는 민영필(閔泳弼)이다.
1887년(고종 24) 정시 문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동몽교관(童蒙敎官)‧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있을 때, 형 좌승지(左承旨) 민정식(閔正植)이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상피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상소를 올려 물러났다. 10월에는 우레가 친 이변과 관련하여 임금이 더욱 공부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간언하였다. 1888년(고종 25) 세자가 참여한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입상하였다. 같은 해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지내면서 별겸춘추(別兼春秋)의 직을 수행하였다. 9월에는 이조(吏曹)에서 그의 이름을 민형식(閔亨植)으로 고칠 것을 청하는 문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증조부는 민치복(閔致福)이고, 조부는 민태용(閔泰鏞)이다. 부친 민영목(閔泳穆)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조영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체결한 인물로, 개화주의자 박규수(朴珪壽) 등과 교류하면서 「한성순보」를 발간하는 데 참여했다가 갑신정변 때 참살당하였다. 생부는 민영필(閔泳弼)이다.
1887년(고종 24) 정시 문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동몽교관(童蒙敎官)‧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있을 때, 형 좌승지(左承旨) 민정식(閔正植)이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상피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상소를 올려 물러났다. 10월에는 우레가 친 이변과 관련하여 임금이 더욱 공부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간언하였다. 1888년(고종 25) 세자가 참여한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입상하였다. 같은 해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지내면서 별겸춘추(別兼春秋)의 직을 수행하였다. 9월에는 이조(吏曹)에서 그의 이름을 민형식(閔亨植)으로 고칠 것을 청하는 문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承政院日記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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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