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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승(曺萬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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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중(壽仲)
생년1862(철종 13)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조석우(曺錫雨)

[상세내용]

조만승(曺萬承)
1862년(철종 13)~미상.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수중(壽仲)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숭록대부(崇祿大夫)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조윤대(曹允大)이고,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시강원사서(行侍講院司書) 조용진(曹龍振)이며, 부친은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조석우(曺錫雨)이다.

1885년(고종 22) 식년시 진사 3등 95위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 26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집의(執義)‧시강원겸필선(侍講院兼弼善)‧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의주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고종 24) 대교권점(待敎圈點)이 시행되었을 때 권점을 받았다. 1890년(고종 27) 대사헌(大司憲) 김명규(金明圭)‧대사간(大司諫) 홍승헌(洪承憲) 등과 함께 대간(臺諫)의 품위를 손상시킨 고시협(高時協)‧서상집(徐相集)‧여규형(呂圭亨)을 풀어주라는 임금의 명이 있자 이를 거둬달라는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91년(고종 28) 임금이 직접 수릉(綏陵)과 산릉(山陵)에 나가 제사를 지낼 때와 왕세자가 건원릉(健元陵)에 갈 때 대축(大祝)으로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가자(加資)되었다. 1894년(고종 31) 의주부윤 시절 탐욕을 부리며 29만 2,220냥에 달하는 비리를 저지른 죄로 형틀에 채워져 남간(南間)에 갇혔다가 큰 거리에서 형장(刑杖)에 처해진 뒤 섬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비리를 저지른 액수만큼의 돈을 조정에 내도록 조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高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