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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영(吳春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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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오주영(吳周泳)
생년1848(헌종 1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오성선(吳聖善)

[상세내용]

오춘영(吳春泳)
1848년(헌종 14)~미상. 조선 말기 문신. 오주영(吳周泳)으로 개명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증조부는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내고 『소화외사(小華外史)』를 지은 오경원(吳慶元)이고,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사옹원첨정(前行司饔院僉正) 오현상(吳顯相)이며, 부친은 오성선(吳聖善)이다, 1888년(고종 25)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임명되었다. 1889년(고종 26) 경기도 지평현(砥平縣)의 유생 한용석(韓容奭)이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고, 그의 무리인 유지영(柳智永)은 한용석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아 역참(驛站)의 종을 향교에 입학시켜 신역(身役)을 면제받게 한 일이 있었다. 이 고을 현감(縣監)이었던 이승희(李承喜)가 이들을 처벌하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오춘영은 홍문관수찬으로서 이승희를 더욱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0년(고종 27) 대왕대비가 승하한 후 고종에게 식사를 회복할 것과 산릉에 따라가지 말 것을 청하였다. 1891년(고종 28)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예조참의(禮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892년(고종 29) 오주영(吳周泳)으로 개명한 후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고, 1895년(고종 32)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다. 1897년(광무 1) 중추원2등의관(中樞院二等議官)에 임용되었다. 1899년에는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정낙용(鄭洛鎔)과 토지분쟁이 일어난 오헌영(吳憲泳)의 대변인이 되어 고등재판소에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