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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덕(安鍾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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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안언택(安彦澤)
자(字)태로(兌老)
호(號)석하(石荷)
생년1841(헌종 7)
졸년1907(융희 1)
시대조선후기
본관광주(廣州)
활동분야관료

[상세내용]

안종덕(安鍾悳)
1841년(헌종 7) 10월 9일∼1907년(융희 1) 7월 29일. 조선 말기 관료‧문신. 자는 태로(兌老)이고, 호는 석하(石荷)이며, 초명(初名)은 안언택(安彦澤)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밀양(密陽)이다.

증조부는 안형중(安珩重)이고, 조부는 안효상(安孝庠)이다. 부친은 안정원(安貞遠)이고, 생부 안문원(安聞遠)과 생모 민양로(閔良魯)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송진봉(宋鎭鳳)의 딸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학문은 밀주(密州:현 밀양)에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이후로 제일이라는 당대의 평가가 있다.

1882년(고종 19) 증광시 진사 3등 118위로 급제하였고, 이도재(李道宰)의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886년(고종 23) 문경(聞慶) 현감으로 임명된 다음부터 1906년(광무 10)까지 경상도의 양산군수(梁山郡守)‧울산부사(蔚山府使)‧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시흥직산안핵사(始興稷山按覈使)‧전라남도순찰사(全羅南道巡察使)‧청송군수(靑松郡守)‧경상북도선유사(慶尙北道宣諭使) 등을 역임하였다. 문경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10조목의 「향교교폐절목(鄕校矯弊節目)」을 지어 향교의 폐단을 바로 잡았다.

1903년(광무 7) 적신(賊臣)들이 백동화(白銅貨)를 주조(鑄造)하면서 생긴 폐단이 극심해지자 시정책(時政策)을 건의한 상소를 올렸다. 1904년(광무 8) 한일협약의정서(韓日協約議定書) 체결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조인(調印)에 참여한 이지용(李址鎔) 등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녀를 두었다. 동생 안종헌(安鍾憲)의 아들 안긍수(安肯洙)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저서로 『석하집(石荷集)』이 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承政院日記(高宗)
石荷集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