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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익수(黃益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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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황필수(黃弼秀)
자(字)이겸(而謙)
생년1836(헌종 2)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황하연(黃夏淵)

[상세내용]

황익수(黃益秀)
1836년(헌종 2)~미상.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이겸(而謙)이고, 개명한 이름은 황필수(黃弼秀)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증조부는 황기정(黃基定)이고, 조부는 황종만(黃鍾萬)이며, 부친은 황하연(黃夏淵)이다. 외조부는 사어(司禦) 윤응현(尹應鉉)이고, 처부는 민의철(閔義喆)이다. 형은 황학수(黃學秀)이고, 동생은 황덕수(黃悳秀)이다.

1865년(고종 2) 식년시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866년(고종 3)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수령의 책무에 소홀하여 조금의 응전도 못하고 성을 빼앗긴 유수(留守) 이인기(李寅夔)와 성을 버리고 달아난 부장(副將) 이용회(李龍會)에게 사형이 아닌 유배형만 가해진 것은 문제라는 상소를 올렸다. 일본과 1876년(고종 13)에 체결한 굴욕적 통상조약에 분노한 최익현(崔益鉉)이 대궐 앞에서 도끼를 들고 화의(和議)를 반대하다가 전라남도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를 갔는데, 1878년(고종 15) 정언으로 재임하면서 최익현을 석방하라는 임금의 하교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縉紳八世譜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高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