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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묵(鄭學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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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칙(聖則)
호(號)금초(錦樵)
생년1829(순조 29)
졸년1903(광무 7)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정한동(鄭翰東)

[상세내용]

정학묵(鄭學黙)
1829년(순조 29)~1903년(광무 7)(주1)
졸년
東萊鄭氏昌原公派譜 卷之二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함.
.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성습(聖習)‧성칙(聖則), 호는 금초(錦樵)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봉천군(蓬川君) 정지익(鄭之翼)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봉은군(蓬恩君) 정언복(鄭彦復)이며, 조부는 봉원군(蓬原君) 정혼(鄭混)이다. 부친 봉안군(蓬安君) 정한동(鄭翰東)과 모친 이건행(李健行)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부는 한양조씨 조석동(趙奭東)이다(주2)
처부
東萊鄭氏昌原公派譜 卷之二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함.
.

1860년(철종 11)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추도기유생(秋到記儒生)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시험에 참여하여 강(講) 분야의 수석을 차지하였고,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1861년(철종 12)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1869년(고종 6)에 정언(正言)으로 재직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김영로(金永珯) 등과 함께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제릉(齊陵) 등의 왕실 제사 때 좌통례(左通禮)로 참여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다. 1882년(고종 19)에는 덕원부사(德源府使)로 재직 중이었는데, 일본인들이 유람을 하다가 일련의 무리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치안을 엄중하게 단속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당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임명되었다. 1902년(광무 6)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70세 이상인 4품 이상의 조정 관리들과 80세인 5품 이하의 조정 관리들을 가자 할 때 승급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