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후열(李後說)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D6C4C5F4B1631X0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관리

[상세내용]

이후열(李後說)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 관리.

1710년(숙종 36)에 위원군수(渭原郡守)로 재직 중, 송흥준(宋興準)‧이만건(李萬建)‧이선의(李先儀)‧이준원(李浚元) 등이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약탈한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 인삼밭 장막(帳幕)에 있던 청나라 담당관들 중에 도망을 쳤다가 이후 동료들을 이끌고 위원 지역으로 내려와 도적들을 인도하라고 협박을 하였다. 이때 당시 해당 지역의 군수 직을 맡고 있었음에도 대국의 위신에 겁을 먹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다. 이후 소란이 계속되자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연회를 날마다 베풀어주어 사건을 무마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국문(鞠問)을 받은 후 의주(義州)로 유배를 당하였다.

1712년(숙종 38)에 그 일이 재차 거론되었고, 정언(正言) 권익관(權益寬)은 그의 행동이 국가의 위신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하며 형의 가중을 청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감등(減等) 처분이 내려졌다. 1714년(숙종 40)에 사면령이 내려지기는 하였으나, 지평(持平) 김재로(金在魯)는 그의 죄가 용서할 수 없는 사안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면서 사면령의 철회를 건의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