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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찬(洪秉纘)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4DBCD1CC2CU9999X0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종하(洪鍾夏)
외조부백주진(白周鎭)

[관련정보]

[상세내용]

홍병찬(洪秉纘)
생물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이다. 부친은 홍종하(洪鍾夏)이고, 모친은 백주진(白周鎭)의 딸이다. 1777년(정조 1) 대사간에 올랐고, 1780년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역적 홍인한과 교분이 있어 귀양 갔으나 그 곳에서도 토호(土豪) 노릇을 하며 백성들을 탐학한 김제행(金齊行)의 불법을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거(削去)되고 원주목(原州牧)에 정배(定配)되었다. 1년 후 방면되었으며 곧 대사간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 대사간을 거쳐, 1787년(정조 11)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제수받았으나 황해감사 시절 평산(平山) 지역의 살인에 대한 옥사(獄事)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잠시 동안 삭직되었다. 이어 1787년(정조 11) 5월 7일 정조는 그를 경상도관찰사로 삼았으나, 지난번 해서(海西)의 옥사(獄事)에서 교화(敎化)를 손상시킨 잘못이 있다 하여 잠시 후 다시 해임하도록 하교하였다. 같은 해 잠깐 동안 대사성으로 있다가 곧 교체되었다. 1788년(정조 12) 비변사제조를 거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파견되었다가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참판에 복귀하였으나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789년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1790년 이조참판에 재발탁되었으나 첫 벼슬에 나선 형제를 한꺼번에 추천할 수 없는 전관(銓官: 문무관의 인사 사무를 관장하는 이조‧병조의 관원)의 인사 원칙을 어긴 죄목으로 파직되었으며 다시 벼슬에 등용되지 않는 처벌이 시행되었다. 1791년에는 앞의 죄목으로 거제부(巨濟府)에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萬姓大同譜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