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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걸(羅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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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흥(中興)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예술‧체육 > 서예가
나삼(羅蔘)
저서『필경(筆經)』

[상세내용]

나걸(羅杰)
생졸년 미상.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흥(中興).

부친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세자익위사사어(行世子翊衛司司禦) 나삼(羅蔘)이고, 형 나열(羅烈)은 1753년(영조 29)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 3위에 합격하였다. 형제가 순조 때 시와 서예로 이름을 날렸는데, 나걸은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였다. 초경(草經) 427언을 남겼다.

연암 박지원과 벗으로서 교유하였다. 연암『열하일기(熱河日記)』피서록(避暑錄)나걸의 서예가이자 시인으로서의 진면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나걸은 ‘글 잘하고 괴걸(魁傑)한 선비’이고 역리(易理)에 조예가 있었으며, 조위(曹魏) 때의 서예가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휴지나 편지와 같은 종이 한 쪽이라도 얻게 되면 뒷장에 육조(六朝) 때 양(梁)나라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초산(焦山) 석벽 위에 지어 새겼다는 ‘예학명(瘞鶴銘)’ 두어 글자를 쓰다가 종이가 부족하여 점이나 획을 마음껏 쓰지 못할 경우에는 그대로 종이 밖으로 써 내려가 앉은 자리가 모두 검게 되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걸을 맞이할 때는 벼루와 연적 등을 감춘 뒤에 맞이하고, 나걸은 방에 들어오면 종이와 붓을 먼저 찾고, 찾지 못한 뒤에야 인사를 교환할 정도로 진솔하였다고 한다.

1776년(정조 즉위)에 서장관(書狀官) 신사운(申思運)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처자를 태우고 무주(茂州) 적상산(赤裳山)으로 들어갔다. 연암이 간직하고 있던 나걸의 행초(行草)로 쓴 시들을 귀주안찰사(貴州按察使) 기풍액(奇豊額)에게 보여, “창건하고도 침울하며 격력(格力)이 두보(杜甫)와 같다.”는 평을 들었다. 기풍액연암북경의 태학에서 만난 사람으로, 명나라의 경인년(庚寅年 1770) 문과(文科)에 장원하였으며 본래는 조선 사람이라고 한다.

저서로는 『필경(筆經)』이 있으니, 성대중(成大中)『청성집(靑城集)』에 ‘중흥 나걸의 필경에 서함[羅仲興杰筆經序]’이 보인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국역 熱河日記(민족문화추진회)
槿域書畵徵
朝鮮人名辭書
한국서화가인명사전(한문영, 범우사, 2000)

[집필자]

고윤희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